천안 목천에 최고의 ‘효녀(孝女)’가 있었다는 걸 아십니까.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를 통해 ‘부모의 정’을 받고싶은 딸의 이야기입니다. 딸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다하였지만, 아버지는 그런 딸의 마음을 몰라줍니다. 또다른 효녀, 심청이가 부러웠을 겁니다. 비록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졌지만, 그런 딸을 절절히 그리워하고 찾아다니는 심봉사였으니까요.
고려가요의 하나인 ‘사모곡(思母曲)’은 아버지의 사랑보다 어머니의 사랑이 더 크고 지극함을 낫과 호미에 비유하여 읊은 노래로, <악장가사>와 <시용향악보>에 전하며, 작자와 연대는 알 수 없다는데요.
그런데 신라때 가요로 알려진 ‘목주가(木州歌)’가 사모곡과 ‘빼박’입니다.
지금의 천안(天安)인 목주에 살던 한 처녀가 아버지와 계모에게 정성껏 효도를 다하였으나 끝내 사랑을 얻지 못하자 한탄하며 노래를 지었다 하는데, 그것이 ‘목주가’입니다. 작자와 연대는 알 수 없으며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일각에서는 사모곡을 목주가로도 부릅니다. 둘이 같다는 거지요.
그에 따르면, 목주가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목주(목천)지방에서 전설로 유래한 노래랍니다. 목주가는 고려 초기에 이루어진 향부악, 향악인 우리고유의 민속음악입니다.
<고려사>에는 목주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노래의 제목과 목주가 이름만 전해오고 가사는 전하지 않는, 목주효녀가 지은 목주가 노래로 효녀설화를 기록하고 있지요.
여러 고대 향악보에 작가·연대 미상의 고려가요로 전해오는 사모곡의 가사 내용이 목주녀의 사연과 부합되고, 고려라는 시대성으로 볼 때 사모곡과 목주가는 같은 노래로 인정된다고 합니다.
천안에서 천안삼거리를 지나 목천과 북면으로 지나는 길. 좌로는 독립기념관, 우로는 IC로 가는 사거리에서 북면 쪽으로 직진해 50m쯤 가다보면 왼쪽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도로변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이곳은 바로 ‘목주가 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천안시와 천안군이 통합되기 전인 1994년, 천안군이 군유지 6500㎡에 조성한 것입니다.
목주가 탄생지인 목천면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정작 관광객은 얼씬도 안합니다. 잘 알리지도 못했을뿐더러, 마땅히 주차할 공간도 없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숲 속 분지같은 공원에 들어서면 텅 빈 잔디광장에 조형물 한 개와 표석 두개가 달랑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단순히 관광산업만으로 따져도 목주가가 갖고 있는 잠재력은 거대합니다. 천안에 이만한 인지도를 찾기가 쉽지 않거든요. 독립기념관이나 천안삼거리공원 정도나 비교될까 싶군요.
목주가는 ‘효(孝)’를 나타내기 최상입니다. 특히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재정립되길 바라시는 전국, 아니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목주가’는 기회이자 희망이 될 겁니다. 장소나 공간적 문제가 있거든 목천 어디든 다시 ‘목주가’의 위치를 정해도 상관 없습니다.
목주가의 정확한 장소를 알 길이 없으니 ‘목주(목천)’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목주가’ 유래를 살펴보면,
옛날 목주라는 고을에 효녀가 살고 있었다. 효녀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어리지만 목주효녀는 천성이 어질어 계모를 친모처럼 따르고 섬겼다.
그러나 계모는 남편의 재산을 탐해 목주녀가 총명하게 자라는 것이 싫었고, 그 때문에 항상 목주녀의 없는 비행을 남편에게 고해바쳐 아버지의 미움을 사도록 했다.
계모는 음식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으며, 목주녀는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허드렛일만 고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천성이 착한지라 아버지의 심사가 상하실까 싶어 일체 고하는 일이 없었다. 계모의 음해로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도 변명하지 않고, 그저 사죄할 따름이었다.
목주녀의 아버지는 매우 완악한 사람으로, 분별력이 없었다. 착한 계모에게 불공스럽게 대한다고 오해한 아버지는 딸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고, 결국 계모의 충동에 딸을 내쫓고 대문을 걸어잠갔다.
울며불며 애원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어찌할 수 없게 된 목주녀는 걷다걷다 새벽녘 기진맥진하여 땅에 쓰러졌다. 석굴에 홀로 살고 있는 노파가 이를 발견하고 처녀가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어 등에 업고 집에 돌아왔다.
노파는 목주녀의 처지를 듣고 “서로 의지해 살자” 했고, 목주녀는 노파를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시고 노파도 친딸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친모녀처럼 지내는 동안 객지에 나가있던 노파의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목주녀와 짝지워줬다. 부부는 열심히 일해 몇해가 지나자 동리에 졸부로 소문날 만큼 윤택해졌다. 노파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 타계했다.
사는 것에 남부러울 것이 없었으나 효심이 지극한 목주녀는 자나깨나 두고 온 아버지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딸을 내쫓은 후 계모는 가산을 탕진하고 끼니조차 어렵게 지낸다는 소식을 접한 목주녀는 조석에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는 듯 괴로웠다.
목주녀의 남편도 본시 착한 품성이라 그런 아내를 보며 목주녀의 아버지와 계모를 모셔왔다. 피골이 상접했던 아버지와 계모는 목주녀의 극진한 공경에 날이 갈수록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계모는 “이렇게 윤택하게 살면서 부모봉양이 소홀하다” 했고, 꼬드김에 넘어간 아버지는 딸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아버지와 계모의 불평은 날로 더해갔다. 목주녀는 자기 먹을 것도 안 먹으면서 극진히 모셨지만 아버지 내외의 심사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하루는 김을 매러 밭에 나갔다가 해가 서산에 기울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목주녀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어린 목주녀를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반대로 딸의 정성을 조금도 몰라주는 아버지가 너무도 야속했다. 아버지도 어머니와 다름없는 부모이건만 어찌 어머니 사랑은 그렇게 두텁고, 아버지 사랑은 그렇게도 얇은가. 목주녀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래는 ‘목주가’라 하여 오늘까지 전해 내려온다.
호미도 날이지 만은
낫같이 들리도 없습니다.
아버지도 어버이지만은
위 덩뎌 듕성
어머님 같이 사랑하실 이가 없습니다.
아시오 임이시어
어머님 같이 사랑하실 분이 없습니다.
악보상에 나타난 <사모곡>의 음악적 내용은 ≪시용향악보≫에 의하면 계면조의 선법에 16정간보 8행의 길이로 되어 있고, ≪금합자보≫에 의하면 거문고의 대현(大絃) 5괘가 궁(宮)인 임종평조(林鐘平調)로 되어 있다.
한편, 국문학계에서는 사모곡을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목주가(木州歌)와 같은 곡으로 보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러나 <사모곡>이 대부분의 고려 속요가 지니고 있는 3음보 율격의 반복 어구와 댓구의 사용, 여음(餘音)의 사용, 단연체(單聯體)의 시상을 연장체(聯章體)의 형식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원형상으로는 <목주가>와 관련이 있음을 고려해 본다 하더라도 악보로 정착된 <사모곡>은 <목주가>와는 달리 완전히 고려 속요로 전환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목주가(木州歌)===
신라의 가요.지금의 충청도 천안(天安)에 사는 어느 효녀가 지었다 한다. 노래는 전하지 않고, 지어진 유래만 <고려사> 권71에 전한다. 유래는 목주에 한 효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버지와 계모를 효도로써 섬기었다. 그러나 계모는 그녀를 모함했고,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어느 석굴 속에 사는 할멈의 구원을 받아 그 며느리가 되어 열심히 일을 한 끝에 부자가 되었다.
후에 부모가 재산을 탕진하고 고생한다는 소문을 듣고 모셔다가 섬기었으나 역시 미움을 받았으므로 그 애틋한 심정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