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말하는 흔한 ‘처세술’은 걸음마 같은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맹종(盲從)해서는 다 큰 어른이 되어도 어기적 어기적 걷게 될 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처세술이란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가 지향하는 시각에 맞춰 ‘내’가 나와 사회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고자 하는 것에 기준을 두고 있다.
사회라는 것이 집단이다 보니 획일화를 꿈꾼다. 15%의 실패자와 15%의 성공자, 그리고 70%의 그렇고 그런 무던한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회의 목표다. 그것을 위해 사회는 때로 냉정하고, 때론 격하게 감정적이 된다.
그곳에서의 성공자는 15%밖에 안되지만 그들마저 진정한 삶의 승리자는 아니다. 사회가 성공했다고 인정하지만, 기준이 잘못됐다. 사회가 아닌 ‘사람의 바른 삶’ 자체로 둔다면 실패자일 수도 있다. 사회적 기준은 인간 삶의 높은 경지가 아닌, 하향평준화된 기준이기 때문이다.
예로, 악인과는 같은 방향으로 걷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 한다. 악에 물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악인과는 어떤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할까.
나로 인해 악인을 교화할 수는 없을까. 악인을 통해 내가 더 단단히 배울 수도 있을까. 악인이 더 이상 악하지 않게 될 수 있다면 나는 악인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위험도 -즉 고통과 어려움, 슬픔, 절망 등- 는 높아질지언정, 나와 악인이 얻을 수 있는 삶의 참 가치에 대한 기회는 얼마나 유용한 것일까. 손실로만 계산해도 수배, 수십배 남는 장사 아닐는지...
세상을 잘 사는 것은 ‘나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다. 나보다는 남이 잘 살게 되는 것을 원해야 한다. 더 좋은 것은 ‘남’과 ‘나’가 모두 잘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남을 잘 살게 노력하는 자체로 나는 이미 잘 사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를 가르친 처세는 어쩌면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고기를 물고 있는 까마귀에게 “당신의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들려주세요?” 라고 말해, 자만한 까마귀로부터 물고 있는 고기를 떨어뜨려 빼앗는 것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