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독서에 귀 기울이고 있는 밤. 두툭 툭툭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린다. 누구일까? 건너편 아파트 불빛도 하나하나 꺼져가고 있다. 밖은 더욱 짙은 어둠이 빛을 몰아내는 중이다. 어둠은 빛에 늘 쫓겨 다니다 밤에는 주인행세를 하는 것인가. 강풍에 쓸려온 비가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에 내린 비에 매화 봉오리가 툭툭 터지더니 길가에 옹벽 틈바구니에는 쑥이며 민들레들이 초록으로 들어 올리고 있었는데. 반가운 손님이 늦은 밤에 찾아오고 있었다. 춘야우(春夜雨)라 했던가.
이제 온 대지가 흔들릴 것이고 꿈틀거릴 것이다. 이른 아침 호숫가의 연한 물안개를 안고 개나리가 노란 주둥이를 삐죽 내밀고 반긴다. 화살나무도 화살인양 가시 모양을 하고 눈꺼풀을 여는 중이다. 물안개의 습기를 받아 능수버들은 노란 강아지를 매달아 올리는 중인지 하늘하늘 춤을 추며 엉덩이까지도 살랑살랑 흔들어댄다. 호수로 가는 길가에 순백의 매화와 분홍의 매화가 웃으며 인사를 했는데 내가 그냥 지나쳤네, 아니 노란 산수유도 인사를 했는데 미안하기 그지없네. 돌아가는 길에는 귀에 집중하지 말고 눈에 집중하고 인사하리라. 순백의 목련화는 진주 품은 조개가 입술을 열 듯 벌어지고 있다. 어느 집 담 넘어 보이는 귀퉁이 땅에 정갈하게 가꿔놓은 곳에 하얗고 노란 수선화 꽃송이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고, 양지바른 곳에는 진달래 봉우리가 신선하게 아침 이슬을 머금고 이슬이 떨어지면 옥문을 열어 보이려는 자세인 듯한 포즈를 하고 있다. 이제 곧 벚꽃도 복숭아꽃도 요염한 자태를 뽐내기 시작하겠지.
이렇게 많은 일로 밤새도록 비바람이 온 세상을 흔들어 놓았구나. 참 신비롭기도 하여라. 매년 오고 가는 봄이건만 어제 밤비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을 하고 대지를 흔들어 놓고 간 것인가. 입가에 웃음을 남기고 간 것인가. 호수를 유영하던 많은 청둥오리는 다 어디로 간 것인지 외로운 검둥이 한 마리만 혼자 방황하고 있다. 밤새도록 짝을 잃고 헤매느라 마음이 까맣게 탔나? 그래서 몸조차 숯 검댕이 된 것인가? 그의 짝은 어디를 간 것인가.
창문에 부딪히는 봄비는 나를 더 고요 속으로 침잠시킨다. 눈은 더 초롱초롱해진다.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봄비 내리는 밤에 맞는 시가 있었지. 1300여 년 전의 당나라에 시성詩聖이라 추앙받는 두보杜甫가 떠올랐다. 그의 수많은 시중에 이 밤에 딱 맞는 시가 아닌가. <봄밤의 기쁜 비>가 그랬다.
春夜喜雨(춘야희우, 봄밤의 기쁜 비) / 두보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當春及發生(당춘급발생)/ 봄을 맞아 모든 것을 피워내고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살며시 밤에 들어와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만물을 적시나 가늘어 소리가 없네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 들길은 구름과 함께 어두운데
江船火独明(강선화독명)/ 강가 배안의 등은 홀로 밝네.
曉看紅濕處(효간홍습처)/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
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꽃이 활짝 핀 금관성이구나
1300여 년 전 그 시절에 두보(712-770) 또한 봄비의 감흥은 이 밤의 나와 다르지 않았나보다. 시성 두보는 시선(詩仙) 이백(702-762)과 함께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다. 하지만 시선 이백은 젊은 시절부터 한시와 기행으로 천하에 알려진 데 반해서 두보는 죽어서야 그의 시적 가치를 인정받고 시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58세에 죽은 두보는 생활이 어려웠고 관운도 없어 가난을 면치 못했다. 올곧은 성격의 직언 등이 고난의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죽고 난 후 중당기의 한유, 백거이 등이 숭배했지만 북송 시기의 왕안석과 소동파 등에 의해 중국 최고의 민중시인, 시성으로 추앙 받으며 위상이 높여졌다. 그의 시는 단순한 천재성이 아닌 한 글자 한 글자가 뼈를 깎는 고통의 산물이었다고 한다. 이 시를 쓰기는 761년 봄 산시에 가뭄으로 고통을 겪던 시기를 겪은 후였다. 스촨성두(泗川成都)에 정주하였다. 이 시는 청두초당(成都草堂)에 2년을 살면서 몸소 농사와 꽃을 길렀다. 그래서 봄비에 정이 갔고 교류를 하기에 이르니 봄 저녁 내리는 비가 만물을 소생 시키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나의 마음도 시성이라 불리는 두보의 생각에 어찌 미칠까마는 그의 시 속에 다시 빠져보며 어릴 적 고향에서의 봄도 소환해 본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시성(詩聖)과 시선(詩仙) 누가 더 높은 경지에 닿아있는 것일까? 이런 나의 생각은 부질없는 바보 같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