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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김시민장군 유허지

천안의 문화재.. 병천면 가전리

등록일 2022년03월14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지정/ 충청남도 기념물 제166호
지정일/ 2004년 4월 10일 
수량/ 1765㎡(생가지, 사사처)
소유자/ 천안시
소재지/ 병천면 김시민길 23


김시민 장군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을 이끈 명장입니다. 그런 그가 천안 병천에서 태어나 25세까지 살았다는 것을 압니까? 

1554년에 태어났으니 지금(2022년)으로부터 468년 전 사람입니다. 

천안시는 2006년 9월 ‘김시민 장군 유허지 정비 기본계획 연구용역 최종보고회(용역기관 충남역사문화원)’를 가졌습니다. 장군의 유허지를 학술적으로 규명하고 유적을 보존·정비하기 위해서였죠. 

최종보고회는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생가공간은 생가지 원형상태를 최대한 보존한다 ▷사사처와 연못은 최대한 원형으로 환원한다 ▷정비대상 지역 내 민가와 사유지를 선별매입한다 ▷생가는 발굴 후 정비한다 ▷서측지역에는 전시관, 국궁체험시설, 다목적마당, 주차장 시설을 둔다 ▷유년기 진군놀이, 사서처 전설 등을 조형물로 제작·전시한다. 


생가지, 고증돼야 복원가능
 


그 후 2008년 천안시가 국비지원을 받아 생가지로 추정되는 병천면 가전리 460-1번지 1583㎡의 터를 사들여 지장물을 철거하고 평탄작업까지 마쳤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진척이 없습니다. 생가지라는 근거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04년 유허지(역사적 사실이 기록만 남아있고, 그 장소에 유물이나 문화재가 전혀 없는 곳)로나마 지정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66호>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개년 사업으로 생가지 복원과 전시관 건립, 주변 편의시설 설치 등 김시민장군 유허지 정비기본계획에 따라 2015년까지 44억원을 투입해 마무리하겠다는 시의 의지는 ‘멈춤’ 상태가 되었습니다. 



김시민 장군 동상 건립은 이뤄졌네요 




김시민 장군 동상건립은 사단법인 충무공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가 범국민모금운동으로 추진하려 했습니다. 2010년 도병국 시의원이 의회 5분발언에서 “천안이 낳은 역사의 영웅임에도 자랑할 만한 유적지 하나 없다”며 동상 건립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천안시는 2012년 3월 동상건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해 7월 도비(소규모 주민숙원사업비) 2억원, 12월 추경에 2억원, 2013년 6월 도비 2억원(시책추진보전금) 등 모두 6억원의 재원을 마련하고 여기에 토목공사 등에 필요한 1억원을 시가 별도부담합니다. 
 

참고로 동상 옆에 ‘원님행차’와 ‘이무기’ 일화가 함께 있지만 이무기 일화에 원님행차 내용을 소개해놓고는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방치돼 아쉬움을 줍니다. 
 

김시민 장군은 어떤 분?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 중 가장 크게 왜군을 섬멸해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 중의 명장입니다. 임진왜란 3대첩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충무공 김시민의 진주대첩을 꼽습니다. 

김시민 장군은 우리 고장 천안 병천면 가전리 잣밭 백전동천(栢田洞天)에서 1554(조선 명종9)년에 태어났습니다.(음력 8.27) 고려시대 충렬공 김방경 장군의 12세손이며 조선조에 강직한 학자인 구암(龜巖) 김충갑 선생의 셋째아들로 자랐죠. 

(천안시가 펴낸 ‘천안의 문화유산’에 따르면 이곳 유허지는 -가전리 백전마을 노인들 구전에 따르면 김시민 장군이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던 생가지-로 전하고 있다. 또한 구암집 등의 사료에는 목천면 백촌리(현 병천면 가전리)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군이 진주대첩을 승리하던 날 성안을 순회하면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검시하던 중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적의 총에 맞아 순국한 때가 향년 39세였습니다. “내가 적탄을 몸에 지니고 죽을 수는 없다”며 나무못으로 적탄을 빼게 하였는데, 이때가 1592년(선조25) 음력 10월18일이었습니다. 공은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목사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장군의 사망일시는 임진잡록에는 10월 18일로, 족보에는 12월 26일로 되어있다.)

후세사람들이 장군의 공적을 흠모하며 사우(祀宇)를 여러곳에 세웠는데 진주의 충민사(忠愍祠), 괴산의 충민사(忠愍祠), 목천의 충렬사(忠烈祠) 등이 그것입니다. 진주와 목천의 사우는 헐어져 철거해 버린 후 오늘날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충무공은 무인으로 국가에 몸과 마음을 받쳐 헌신하신 분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시호입니다.

조선시대 충무공 시호를 받은 분은 이순신, 김시민, 이준, 남이, 조영무, 김응하, 이수일, 구인후, 정충신 아홉 분입니다. 특히 임진왜란 3대첩 장군들은 후세에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웅 충무공 김시민 장군, 호걸 충장공 권율 장군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성웅은 거룩하리만큼 뛰어난 영웅을, 영웅은 재지(才智)와 담력과 무용(武勇)이 특별한 인물을, 호걸은 지용(智勇)이 뛰어나고 도량과 기개를 갖춘 장군을 일컫는 말입니다.

당대의 명문인 안동김씨 문중에서 태어난 장군은 집안 대대로 전하여 오는 학문의 영향을 받아 불의에 타협하거나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학문보다는 병정놀이에 관심이 많았던 장군은 가문 내 인사들이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의 영광을 누렸던 것에 비해 25세때 1578(선조11)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습니다. 급제 후 훈련원 판관(判官) 벼슬을 받고 군기(軍器)가 녹슬고 군기(軍紀)는 해이하여 유사시에 쓸만한 병기와 군병이 없음을 개탄하고 시급히 대책강구를 상급기관에 건의하였다가 망언이라 질타와 수모만 당하자 이에 의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죠.


그의 어릴 적 일화 두건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 장군이 8살에 길가에서 아이들과 별정놀이를 하고 놀 때 지나는 원님행차를 가로막아 원님을 말에서 내려 비켜가게 한 일화는 어린 김시민이 큰 재목감임을 보여줍니다. 

2. 또 9살때는 동네사람들을 공포로 떨게 하는 뱀을 활을 쏘아 제거시킨 용맹성은 인근부락까지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백전동천 마을에 뱀을 죽인 일화가 있는 사사처(射蛇處)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진주성대첩과 그의 죽음에는 기록하는 바가 약간 다릅니다. 

‘다음 백과’에 따르면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탄환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해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져 며칠 뒤에 죽었다. 죽은 뒤 성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했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다- 고 한다.  
 

(천안시 ‘천안의 문화유산’에서는 -3800여명의 군사로 3만여 명의 왜병을 맞아 2만여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고 했다.)

진주성대첩 ‘어학사전’에는 -1592(선조 25)년 10월 5일부터 10일에 걸쳐 김시민이 지휘하는 3800명의 진주성 수성군이 왜장 나가오카 다다오카(長岡忠興)가 거느린 2만명의 왜군을 물리쳤다-고 설명해 놓고 있다. 

우리 군사는 3800여명이 맞는 것 같고, 왜병은 2만명을 언급하는게 많은데 간혹 3만명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전투결과로는 우리 전사자가 2000명 이상, 왜병 전사자는 1만명 이상.


일본에서도 ‘김시민 장군’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의 주도로 조선관민이 보여준 필사의 항전으로 일본의 정예병력이 패배했기에, 조선의 맹장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죠. 일본군은 김시민을 <모쿠소>라 불렀는데 이는 목사 직책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모쿠소’란 캐릭터는 조선군의 맹장이자 충신이면서 원한을 품고 일본을 전복하려는 원귀로 가부키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2011년 4월 윤일현 국궁9단 인터뷰. 
“천안에 김시민 장군배 전국국궁대회 개최가 꿈” 
 

“고주몽(드라마)의 ‘송일국’이 말야, 내가 (활쏘기)가르쳤거든. 송은 제대로 배웠지.” 

천안 선문대 정문도로 맞은편에 자리잡은 ‘천궁정’. 백석동 시립묘지 일대의 개발로 한달 전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쟁쟁한 고수 대여섯명이 모여 활쏘기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이중에는 충남역사에 처음으로 ‘국궁9단’의 최고반열에 오른 천안출신 윤일현(48)씨가 있었다. 2003년도에 활을 잡았고, 2009년 8단가지 올랐다. 그리고 도전 6번째에 이르러 9단에 오른 것이다. 

참고로 국궁은 145미터 과녁이 하나 있으며, 승단에는 모두 45개로 몇발을 맞췄느냐는 것으로 가름한다. 1단은 25개, 2단은 28개를 맞춰야 하며 윤 사범은 마지막 9단이 되기 위해 39개를 맞춰야 했다. 최근 9단에 도전한 30여명 중에는 일현씨만이 영예를 안았다.

일년에 서너번 승단시험을 볼 수 있지만 승단하기란 쉽지 않은 과정. 현재 충남에서만 국궁인이 수천명 되고,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천안도 200명 정도가 된다. 그래도 충남 국궁역사에 ‘9단’은 없었다.

“제 자랑 같지만, 사람들이 선천적이라고들 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게으르고, 그래서 연습도 많이 못했어요. 아마 ‘운칠기삼’이라는 게 저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현충사에서는 매년 4월28일 이순신탄신일에 국궁대회를 여는데, 전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며 ‘대통령배’로도 유일하다.

천안국궁인들의 바람이 있다면 아산처럼 천안에서 전통을 잇는 ‘전국대회’를 치르는 것이다. 대체로 나라를 빛낸 장군들이 태어난 지역은 전국국궁대회도 열고 국궁인들도 활기차다. 아산시의 이순신 장군도 그렇고, 홍성의 최영 장군, 진천의 김유신 장군 등. 그렇게 보면 천안도 ‘김시민 장군배’를 둠직하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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