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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원 수필가- 아파트주민이 ‘생각하다’ 

어느날 새 아파트가 들어서 닫힌 풍경, 그래도 괜찮아

등록일 2022년01월11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밤을 지새운 커튼을 연다. 일봉산 자락에 지어진 아파트 8층은 그런대로 전망이 좋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먼 산의 능선이 선명하게 보이면 기지개를 켜는 팔에 힘이 들어가고, 산으로 냇가로 내달리고 싶어진다. 저녁 무렵에도 창가에 선다. 내가 살던 원성동이 석양에 아름답게 물드는 것이 보고 싶어서다. 
원성동, 그곳은 내가 살던 곳이니 쉬이 기억속의 풍경 안을 헤집는다. 어디는 내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살던 곳이다. 목조로 지은 이층집은 어떠어떠한 모습을 닮고 있어 난 스스로 ‘제일 좋은 집’으로 생각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우리 집 앞에서 자주 걸음을 멈추었다. 마당가에 흐드러진 꽃들 때문이다. 붉은 동자꽃, 머머한 모란꽃, 무더기로 핀 말발도리를 보며 재잘재잘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막 들어간 아들은 덩치 큰 아이의 발차기를 막다가 팔이 부러졌다. 
마당에서 구슬치기하던 아이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 상추를 나르며 고기굽던 마당 한켠, 아침이면 안방까지 햇살이 짖쳐들어왔다. 사람을 좋아하던 남편은 과음한 날이면 집을 옆에 두고도 전화를 했다. 허겁지겁 나선 나를 만나면 아이같이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퇴직하고 처음 자치센터의 요가교실에 갔다. ‘내가 이런 것도 배우다니’ 꿈같아서 혼자 웃었다. 
그런데 언제 아파트로 이사와서는 창가에 서는 횟수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파트 옆에 새 아파트가 들어서며 풍경을 반쯤이나 가려버렸다. 
처음엔 다리를 지나는 차들을 가리더니 도시의 허파처럼 싱그럽던 남산을 가렸다. 마지막엔 쓱쓱 붓으로 그린 것 같은 먼 산의 능선까지 가렸다. 성벽처럼 육중하게 들어선 아파트는 겨우 금실같이 드는 햇살로 건물과 건물 사이의 경계를 알렸다. 
그것을 마주할 때마다 창 앞에서 서성거렸다. 갑자기 누군가 걸음을 막아섰을 때의 마음처럼, 혹은 열심히 일해 온 장소를 이유도 모른 채 빼앗긴 것처럼 생경했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었다. 

풍경은 빼앗겼으나…

나는 지금 이 집도 좋다. 좋은 이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사를 결정하고 집을 구하다가 이 아파트를 만났다. 동쪽은 시원하게 트여 먼 산이 보이고 남쪽엔 손을 뻗으면 닿을 듯 푸른 숲이 있다. 또 주택보다 이웃이 가까워 좋았다. 현관문을 열고 두어걸음 떼면 이웃집 문이다. 
이삿짐을 풀자마자 윗집으로 아랫집으로 이사 떡을 돌렸다. 무조건 벨을 눌러 첫번 수확한 두릅이나 앵두를 나눴다. 친구가 보낸 복숭아 상자도 현관에서 봉지에 담았다. 차츰 인사하는 이웃이 많아지면서 포항 과메기를 넌지시 주시는가 하면 손녀딸 입히라며 분홍잠바도 들여보냈다. 
여름엔 해가 기울기 시작해서야 아이들이 놀이터로 나왔다. 아이들 따라 나온 엄마도, 손자 돌보는 할머니도 자연스레 같이 어울렸다. 돗자리 파티를 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엄마의 마당에서 나눴던 음식이 펼쳐진 날, 나도 사과를 씻어들고 돗자리 위에 엉덩이를 놓았다. 비빔밥을 비비는 양푼도 소리를 냈다. 빈대떡은 들기름 냄새 풍기며 아파트에 딸린 가게까지 갔다. 더 추워지기 전에 한번 더 하자는 높은 목소리가 아이들 소리에 섞여 하늘로 올라갔다. 

숲으로 오니 생각이 열리고

생각에 젖은 마음을 갖고 집 앞 머지않은 숲으로 나갔다. 시원하게 잎을 흔들던 상수리나무가 말하고 싶은 듯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래! 꽃샘바람 지나면 산자락엔 진달래가 무더기로 피어나고 나무들은 가지에 초록을 다느라 분주했지. 4월의 캔버스에 5월이 녹음을 덧칠하고, 7월이 8월과 손을 잡으면 검은 숲은 걷잡을 수 없는 용사같이 전진했다. 
태풍이 불면 떡갈나무는 잎을 부산하게 흔들며 바람이 가져온 숱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겨울 깊은 밤엔 싸락눈과 열애에 빠진 일을 밤새 들려주었지. 소나무는 내 발소리에 익숙한지 지척에만 가도 솔향을 아낌없이 내려주었다. 
그래, 집안에서 보는 풍경이 사라져도 나에게는 다정한 이웃들이 있고, 이처럼 멋진 숲정원이 있잖아. 99석지기가 가난한 자의 1석을 탐하더래. 100석을 채우고 싶어서지. 
숲으로 오니 생각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이 오묘한 이치. 자연이 주는 인간과의 참다운 교감. 난 그 속에 퐁당 빠져 답답한 마음이 한껏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지금 내 풍경을 가로막는 옆 아파트가 색을 입고 집집이 환하게 불을 밝히면 나풀나풀 팔을 흔들며 그곳으로 가리라. 우연히 만나는 이가 있으면 반가운 얼굴로 내가 보던 풍경 이야기와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하리라. 우리가 함께하는 곳이 먼 훗날 눈 감고 그리워할 아름다운 곳이라고, 공간을 나누어 사는 우리가 진정 이웃이라고, 두 손 팔랑팔랑 흔들며 말해주리라. 
새 아파트에서 ‘투득툭탁’ 마무리 작업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맞춰 손을, 마음을 탁탁 털고 창 앞에서 힘껏 기지개를 켰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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