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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지켜지지 않는 약속'

수필이 좋은 날/ 임낙호

등록일 2021년11월26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안녕하세요, 아저씨!"

"어서 오세요! 뭐 좀 하시게요?"

"오늘은 저번에 굽을 해서 할 게 없네요. 구경이나 좀 할까요?"

일찍부터 부지런하게 망치를 두드리고 구두짝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연신 무언가를 주무르고 주위를 맴돌기도 한다. 예리한 칼질 솜씨가 이골이 났다. 손에는 까만 구두약으로 시커멓게 물들었고 손마디가 불거지고 거칠거칠하다.그렇게 나를 반겨야 할 그분이 오늘도 보이질 않는다. 나 또한, 코로나19로 그곳에서의 산행만남이 오랫동안 격조했었다. 작년을 지나 이번 여름까지도 그랬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늘 그 자리에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며 반기던 그분이 안 보인다. 요즘 대장동 사건에도 아리송한 그분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비호감의 그분이 아닌가. 그러나 나의 ‘그분’은 썩은 냄새가 나는 그분과는 다른 ‘그분’이다. 

그분이 보이질 않는다. 구두점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땅콩 파는 트럭이 대신 지키고 있다. 전에는 저쪽 구석에서 됫박으로 땅콩을 팔던 아저씨가 역 앞으로 영전했다. 자리를 산 것인가, 영감의 터를 빌린 것인가. 사뭇 궁금할 뿐이다. 그 자리는 묵시적으로 임자가 정해진 곳이리라. 돈거래는 없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본다. 전철역 광장이었기에 자리다툼은 없었으리라. 그분은 어떤 연유로 자리까지 내어주고 어디로 간 것일까.

언제부턴지는 오래되어 희미하지만 우리는 산행을 위해 늘 이곳 전철역 광장에 집결해서 버스를 타고 산 입구까지 도착한다. 광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좀 일찍 도착한 친구분과 주위를 배회하다가 그분을 만났다. 친구와는 미리 안면도 트고 구두 밑창도 붙이고 했단다. 나도 합세하여 등산화마다 차례로 뒷굽을 붙였다.

어느 날은 우리 동행들과 서로 통성명까지 했다. 나이까지 대조하니 갑장의 나이란다. 80대 나이였다. 퇴직하고 소일거리로 이륜 손수레 점포를 차렸단다. 중고구두 거래도 쏠쏠하단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상황에 따라 내 맘대로 퇴근한다고 했다. 얼마나 자유로운 사업인가! 성실하기도 하여 대단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손수레 점포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무심코 지났다. 다음주도, 또 그 다음주도 보이지 않더니 이제 몇 달째다. 흔적조차도 지워지는 듯했다. 우리는 구두나 등산화 등의 굽이 닳아빠지면 밑창을 덧붙이려고 기다리던 것이, 이제는 그분이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더니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지 염려를 지나 불길한 생각으로 변해갔다. 갑장인 친구 분은, 참 건강해 보였다며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어디 몸이 불편한데, 회복되면 나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또 다른 친구분은 어디 안부를 물어볼 사람도 모르니 더 안타깝다고 했다. 이는 애초에 하지 않은 약속이었기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고 마는 것인가? 그래도 그런 건 아니지 않는가. 늙어서라도 의리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손님들의 애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망하게 의리를 저버리지는 안 할 아저씨 같았는데 어떤 일이 생긴 걸까? 병이 났을까? 돌아가셨을까? 아니면, 할머니가 중병이 들어 병간호라도 하느라 못 나오시는가? 일이 힘들어 늘그막에 여유로운 호기를 부리고 싶었던 것일까?어떤 이의 글에서 나오는 ‘3일의 약속’을 생각해 보았다.

황해도에 살던 모자가 있었다. 어머니라면 자식을 애지중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그런데 아들이 남쪽으로 3일간의 출장을 가게 되었다. 3일 후에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아들은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멀어져가는 아들을 하염없이 동구 밖에서 바라보고 서있었다. 3일 후에 돌아온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못할 거라는 예감을 이미 감지라도 하고 있는 것이었나. 일을 마친 아들은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휴전선으로 왕래를 막아버리니 갈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지키지 못한 ‘3일의 약속’이 되고 말았다.

아들을 기다리던 어미의 심정을 우리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들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지!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구두수선아저씨와의 짝사랑 같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은 ‘3일의 약속’처럼 되지 말고 키 작은 아저씨가 ‘짜잔’ 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착한 그분과의 인연을 되뇌며 친구들과 역전 광장을 배회한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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