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막바지다. 가을엔 무조건 걷고 싶다. 가방 하나 메고 운동화만 신으면 어디든 좋다. 걸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생각도 끌고 온다.
오늘은 천안충무병원 맞은편 창문외과를 시작으로 ‘쌍용동이마트’를 지나 한라동백 아파트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남부대로를 따라 청수동까지 35분거리다.
▲ 길 건너에 충무병원이 보인다.
ㄱ자의 거리니 단순했다. 창문외과 건물 앞 불이 났던 호텔은 정리가 다 되었나 보다. 호텔 앞 건물은 입점을 기다린다는 안내가 붙었다.
그 앞을 지나다 보니 쓰레기가 한 더미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태극기를 들고 전진하는 유관순 동상이 바로 있고 서울치과가 보인다.
▲ 좁은 도로에 이런 것을 왜 놓는지.
몇 걸음 더 가다보니 ‘눈을 크게 뜨시오, 아니면 큰 코 다치리’ 라는 듯 설치물이 도로 가운데를 막고 있다. 핸드폰만 보다가는 넘어지기 쉬울 듯하다. 대놓고 폭력을 쓰는 듯하다.
앞으로 쭈욱 2분거리에 이마트가 있다. 참새가 방앗간 지나치는 일 있던가. 이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보다가 마음을 챙겼다. ‘엊그제 다 사왔잖아.’ 마음 다잡고 그냥 나왔다. 집었다 놓은 연어훈제가 아쉽긴 하다.
▲ 도심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큰 것이 아닌 것을…
이마트를 나와선 방향을 틀어야 한다. 온양쪽이 아니라 신방동쪽으로, 길을 건너자마자 아름다운 꽃이 눈에 띈다.
모퉁이에 자리잡은 치과에서 꽃을 놓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주변을 환하게 하는 화분 몇 개가 우리 도시도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기분 좋은 발걸음이 얼마 못 가서 멈춘다. 고구마, 호박, 고추를 부려놓고 파는 아줌마가 있다.
마음 같아선 걷는데 방해하지 않게 물건을 도로 안쪽으로 넣어달라 말하고 싶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을 보고 말을 못꺼냈다.
『연탄길』에 나온 어머니도 좌판을 놓고 야채를 팔았다. 덕분에 아이들은 밥을 먹고 운동화를 사고 대학에 다녔다.
자투리땅에 포장을 치고 고춧잎을 다듬다 “한 개 더 드리는 거유” 라며 봉지에 담은 고구마를 만원을 주고 샀다. 어깨에 멘 가방이 제법 무겁다. 그런데 무가 자꾸 눈길을 끈다. 잎은 조금 시들었지만 미끈하다.
가을무는 달다. 소고기를 넣고 뭇국을 끓이면 시원하고 감칠맛이 난다. 그래, 무도 하나 넣자. 조금 무거운들 못 걸으랴. 또 걷는다.
신방동 아파트 건물 앞이다. 쓰레기봉투와 약국, 김밥, 사진관 등을 알리는 설치물이 도로에 있다. 이발소에서 수건도 도로에 널었다.
멀리 도로 모퉁이에 가방수선과 열쇠를 파는 컨테이너 상점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금 아쉽다. 재활용을 돕는 수선집이 꼭 있어야 하지만 주변을 조금 정리하면 안될까? 문화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시작은 주변의 불필요한 것부터 없앨 것.
가방 수선하러 오는 이가 없는가? 안을 들여다보니 아저씨는 긴 의자에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여기부터 담쟁이가 눈에 보인다. 아파트 옹벽을 타고 오르는 식물이 여럿이다. 담쟁이, 능소화, 등나무, 아이비, 심지어 작은 나팔꽃까지 오른다.
막 뿌리를 올리다 붉은 물이 든 담쟁이도 있고 이미 울울한 숲처럼 벽을 다 덮은 담쟁이도 있다. 가녀린 줄기의 담쟁이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열대우림의 아나콘다같이 굵은 담쟁이 기둥도 있다. 담쟁이 줄기의 둥치를 보면 옹벽을 쌓은 연수를 가늠할 수 있다. 한 50년 뒤에는 어떤 모습의 둥치가 될까?
담쟁이가 덮은 곳을 지날 땐 무지개 막대사탕이나 달고나 하나 들고 사뿐사뿐 걷고 싶다. 잎이 빨갛게 물들고 바람이 차가워지면 그대의 손 꼭잡고 걷고 싶다.
잠바주머니에 함께 손 넣고 잠시 담쟁이덩굴 앞에 서서 도종환의 ‘담쟁이’란 시를 읊어도 좋으리.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낭만도 잠깐이다. 옹벽모퉁이를 지나면 남부대로가 나온다. 시끄럽다. 마주 오는 차가 곁을 무섭게 지나간다.
구멍 뚫린 방음벽을 그냥 둔 지가 오랜가 보다 생각하는 사이 한라동백 아파트는 끝이 나고 나무사이로 간다.
작은 오솔길이다. 도로 곁에 갓길이 있어도 몇십미터의 오솔길이 생긴 것을 보면 위험을 피하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같은가 보다.
나도 오솔길로 걸음을 둔다. 아차! 왼쪽을 조심하지 않으면 낭떠러지다. 그런데 그 아래엔 차가 지나는 굴이 있다. 난간이라도 설치해야 할 듯하다.
용곡천 다리 끝에 바로 공사표지가 있다. 남부대로에서 용곡 한라간 신설도로를 만드는 중이다. 2022년 4월에 완공된다니 기대가 크다.
길 가의 아름드리나무들이 다 베어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왼쪽 눈들에선 벼 수확이 한창이다. 노랗게 익어가던 벼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독립기념관 행사를 알리는 안내물이 남부대로에 나풀거린다. 아! 10월 말에서 11월 중순까지는 단풍이 절정이지. 독립기념관 뒷길의 단풍도 물을 들이느라 얼굴 빨개지고 있겠다.
▲시내에 걸 곳이 없었나?
그런데 안내를 알리는 것이 두 개가 아니다. 30개가 넘는다. 오가는 이가 거의 없는 남부대로에 이렇게 많이 달아놓은 이유가 궁금하다.
잠시 차가 정체되어 있을때 보라는 것 치고는 너무 많다. 운전 중에 눈길을 돌리다 사고라도 날까 걱정스럽다.
시민의 왕래가 많은 도심에선 못 보고 한적한 이곳에 이렇게 많이 있다니.
목적지 청수동이 가까워지니 걸음이 더 빨라진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내려다보니 길 가의 느티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있다.
아니다. 빨간색으로 물드는 느티나무도 두 그루 있다. 원성동 침례교회와 극동아파트 사이에 둥치 굵은 느티나무가 만들던 장관이 생각난다. 석양을 배경으로 느티나무 잎이 바람에 우수수 사선으로 떨어졌다.
황금빛 호수에 바람이 일어 윤슬같이 아름다워 걸음을 멈추며 보던 추억이다. 한 30년 자라 바람에 붉은 잎, 노란 잎을 날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내려간다.
마지막 난관이다. 남부대로 인도가 끝나는 곳이 위험하다. 차가 잠시 멈추면 횡단보도를 건너 방음차단벽을 뚫은 곳으로 나가야 한다.
잠시 기회를 보다가 차가 안 오는 순간에 얼른 건너 청수동으로 들어섰다. 40분간 풍경도 보고 사색도 하고 건강도 챙기는 걷기를 마치니 기분이 상쾌하고 좋다.
걸으며 눈이 찌푸려지는 풍경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라면 조금씩 개선해나가면 되는 일.
오늘 저녁은 맛있는 불고기를 해먹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