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자(76·천안 청수동) 시인이 첫 시집『허공을 허물다』를 냈다.
시인이 될 조짐은 초등학교 때 보였다. 위문편지를 쓰면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 이름으로 편지를 더 쓰라고 했다. 중학교 때 신동엽 시인이 국어선생님이었다. 글을 써서 선생님 서랍에 넣어놓으면 첨삭해 주셨다. 고등학교때 문예반장을 했고 김동리·박목월 시인이 심사한 전국고교자작시낭송대회에서 장원도 했다.
신 작가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직장 때문에 인천에서 살았다. 중학교부터 서울로 기차통학 했다. 지금도 기적소리는 미지의 세계로 가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그래서 쓰게 된 시가 <야간열차>다.
결혼 후 부산으로 간 시인은 문학에 대한 열정을 잊지 못해 글쓰기에 전념했다. 시조가 좋았다. 율격을 넘어선 자유로움에 더 매력을 느꼈다.
시인이 세상을 보는 눈이 그러하다. 지켜야 할 사회규범이 있되 인간미가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 자신의 삶에서도 정직과 성실을 기본으로 하되 관계에선 늘 타인과 자연에 마음을 연다. 시를 쓰면서 시낭송도 많이 했다.
시인에게 시련도 왔다. 큰아들이 대학에 졸업할 무렵에 남편이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시를 쓰며 마음을 달랬다.〈그 후〉란 시를 보면 그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물오른 목련나무가 신음을 하고 있다
무엇으로 꽃을 피워 이 봄을 노래할까
연둣빛 이파리 몇 닢으로 상처를 보듬고 있다
지구 밖으로 잘려나가 신음하는 분신들
흰 눈물 한 송이가 팝콘처럼 피어나
저 혼자 허공에 별로 떠 백치가 된 목련꽃
슬픔을 잊기 위해 일을 찾았다. 특수아동의 교육활동 보조,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 녹음 봉사, 신체활동이 불편한 어르신 돌봄 등을 하며 살았다. 어느덧 마음은 무뎌졌으나, 그간 세월도 부지런히 지나가 버렸다.
혼자 사는 집에 외로움이 없을 수 없다.〈빗소리〉에선 ‘외발로 일어서야 할 빗줄기 애증의 물길만 깊다’고 했다. 그러나 아픔에만 머물지 않는다.
〈초침소리〉엔 ‘피고 지는 꽃을 위해 내 할 일 무엇인가/ 깊은 산 험한 계곡 살얼음 깨어지는 듯/ 가슴 속 울림소리도/ 절로 바삐 뛰고 있다’며 희망을 노래했다.
신군자 시인은 1989년『월간문학』으로 등단한 후 가향문학회, 미래시시인회, 부재(不在)동인, 부산여류시조문학회에서 활동하고 천안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충남재능시낭송협회 고문으로 있으면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과 문학콘텐츠 마련에 힘을 쏟고 있다.
시인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멋진 시 한 편 써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다”며 웃었다. 역시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이 먼저인가보다. 다른 것 다 마다하고 시를 쓰는 것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