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아이를 가졌다. 자궁속의 아이는 교통사고로 막내딸을 잃은 우리가족에게 희망이자 위로였다. 모처럼 온 가족이 웃음을 되찾은 벅찬 나날들. 한데 임신 7개월째 되던 어느 날 그만 아내가 임신중독증에 빠지고 말았다. 의사는 아이의 생명이 위태롭긴 하지만 수술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럴밖에. 그렇게 해서 아들이 태어났다. 칠삭둥이, 1080그람. 미숙아.
지금에야 많이 달라졌지만 2000년 당시만 하더라도 1080그람은 생명을 유지하기에 벅찬 몸무게였다. 아이는 내 팔뚝만큼도 안됐고, 담당 의사를 만날 때마다 의사의 입에서는 암울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니 각오하라는. 생명을 유지하더라도 정상아로 자라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이를 증명이나 하듯 아이에게선 온갖 합병증이 발생했다. 호흡곤란, 기흉, 뇌출혈 등등. 절망과 좌절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조차 버거운 나날들이었다. 생명을 부지하더라도 장애아로 자랄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부끄럽지만 그런 섬뜩한 생각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나는 비교적 자유로이 신생아중환자실을 드나들 수 있었다. 내가 수련의 생활을 한 병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비로서 사투를 벌이는 아이에게 뭐라도 해야 했기에 나는 아이의 기도에서 분비물을 뽑아내고 환부를 소독하는 일을 자청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아이와 접촉하며 관계를 맺어감에 따라 놀랍게도 생각이 바뀌어가는 게 아닌가. 어떤 장애가 생겨도 좋으니 살아만 달라는. 아빠가 곁에 있어줄 테니 함께 살자는. 나는 그때 깨달았다. 아무리 아비라 할지라도 친밀한 접촉이 없으면 남과 별반 다를 게 없음을. 접촉과 관계를 통해 비로소 아비가 되는 것임을.
백일이 다 되어 아이는 신생아중환자실을 벗어나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해맑게 자랐다. 세 살이 지난 어느 날, 아이가 말이 늦는다 싶어 병원을 찾은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이가 듣지 못한다는. 아내와 나는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말이 늦을지언정 아이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흥얼대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런 아이가 듣지 못한다니. 전국 안 다녀본 병원이 없었다. 하지만 의사들은 하나같이 아이가 듣지 못한다며 인공와우수술을 권유했다. 부모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라는 말도 의사들은 잊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상태나 부모의 의견보다 기계가 뽑아낸 데이터를 더 신뢰하는 의사들을 바라보며 섭섭함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은 아닐지언정 아이가 듣는다고 확신한 아내와 나는 수술을 거부하고 재활치료에 매달렸다. 아이에게 보청기를 착용시키고 언어치료, 음악치료와 같은 재활치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날, 원장 선생님과의 면담이 있었다. 원장 선생님은 아이를 다른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며 넌지시 아내의 의중을 떠봤다. 불만을 가진 부모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펄쩍 뛰자 다른 반 선생님들도 아이가 잘 못 들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의 의견은 달랐다. 아이가 듣는 게 확실한데 무슨 소리냐며 다른 반 선생님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또 한 번 또렷이 목격하게 되었다. 저만치에서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바라보는 것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것을. 주문한 아이의 보청기를 찾아오는 날, 보청기 회사가 대구에 있어 마침 그곳에 강의를 하러 간 지인에게 보청기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지인이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보청기를 찾으러 갔는데, 나이 지긋하신 지인의 어머니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란다.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그 소리를 전해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아이가 거부감을 가질까 싶어 가족 모두가 아이와 함께 착용할 목적으로 가짜 보청기를 주문했던 것인데, 지인의 어머니는 그런 내막을 몰랐던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근사한 무대에 올라 또래의 아이들과 독창 실력을 겨루기도 했고, 현재 첼로를 연주하며 오케스트라 단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아빠 뭐해?” “운전 중이야.” “그래? 아빠 위험해, 끊어.” 아이와 전화통화를 할라치면 매번 가슴이 뭉클해진다. 세상엔 고마운 분들이 참으로 많다. 소아과 의사와 신생아중환자실 간호사들, 언어치료 선생님. 유치원 담임선생님. 동료와 이웃들……. 그분들이 없었다면 이렇듯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는 얘기다. 장애는 disorder나 handicap이라 부르지 질병disease이라 부르지 않는다. 누군가의 관심과 따뜻한 손길이 있으면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기에 장애를 질병과 구분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이와 함께 험난한 길을 헤쳐 나오며 나는 생생히 보았다. 엄연히 다름에도 장애가 질병과 같은 개념으로 취급되는 기이한 세상을.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많은 장애아들이 소외되고 외면당한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기막힌 현실을 본다.
수필가 남호탁 작가는 2008년 ‘수필가 비평’으로 등단해 천안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의사수필가협회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곡문학상, 흑구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똥꼬의사》 《의학박사 남호탁의 똥꼬이야기》 《수면내시경과 붕어빵》 《가끔은 나도 망가지길 꿈꾼다》 《아프지 않으면 죽는 겁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