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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김수인의 '가지치기'

등록일 2021년07월31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올해도 베란다의 나무들이 쑥쑥 자랐다. 이웃나무들과 가지가 뒤엉켜도 자르지 않았더니 작은 숲을 방불케 해서 창을 열어두면 새라도 날아들 것 같다.
그 나무들을 앞에 두고 차를 마시면 밴자민과 파키라와 알로우카리아와 폴리시아스, 그리고 관음죽과 개운죽, 천사의 나팔꽃과 아마릴리스 등 식물들의 풋풋한 향이 밀려들어 청량하기 이를 데 없다.

나와는 반대로 관리소 직원들은 해마다 가지치기를 한다. 화단에 심어진 동백꽃, 목련, 종려나무, 향나무 등을 모질게시리 잘라버린다. 수북이 쌓인 가지들의 잔해를 보며 속이 상해서 이웃분들에게 “관리소 직원들은 나무가 크는 꼴을 못 본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꽃봉오리가 망울망울 맺힌 나무들을 사정없이 잘라 버리는 저 사람들에게도 정이 있나 싶다.
참다못해 왜 나무를 자르느냐고 물었더니 1층에 사는 분들의 조망이 가려서 친다고 했다. 그러면 아예 심지를 말아야지 새순만 올라오면 가위를 들이대니 살아남겠느냐고 볼멘소리로 쏘아 주었다.  

오늘 옛 마을에 들렀다가 노거수인 당산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얼마나 긴 세월을 버텨왔기에 저토록 둥치가 우람할까.’ 차를 세우고 당산 앞에 세워진 나무의 내력을 읽어봤다.
고려 말에 원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심었다고 해서 일명 ‘원 정자나무’라 부르는데 수령이 약 700년, 나무둘레가 7m, 수고가 15m나 된다고 적혀있다. 장정 예닐곱명이 팔을 둘러안아야 싸일 만큼 둥치가 거대한데, 그에 비해 가지는 그다지 늘어지게 뻗지 않았다. 아주 안정감 있게 수형이 잡혀서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꿈쩍 않고 버틸 것 같다.
옆에 계신 노인께 나무가 어쩜 이렇게 균형이 잘 잡혔느냐고 여쭈었더니 “마을사람들이 해마다 사다리를 놓고 웃자라는 가지들을 잘라 주어서지요.” 라고 답을 주셨다.
‘그래서 둥치에 영양분이 모이고 수형이 안정감 있게 자랐구나.’ 웃자라는 가지들을 쳐주는 게 나쁜 것만이 아니란 생각이 스쳐가자 관리소 직원들에게 불평을 말한 게 미안해진다. 
 
엊그제 ‘박제상 문학제’에서 양산시장님의 격려사가 가슴에 꽂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 잘 나가는 직종이 대다수 없어지며 한 평생 직장을 열 번은 바꿔야 살아갈 수 있다.”고 격변하는 시대를 앞짚어 주셨다.
시장님의 말씀대로 미래가 변해간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앞선다. 시장님은 “나무는 빗물만 마시고도 한 자리에서 700년을 살아가는데 하물며 사람이 닥쳐오는 일을 헤쳐나가지 못할 것인가.”라며 괜한 염려를 한다고 했다.
 
시장님 말씀대로라면 나는 시대를 앞선 사람이다. 벌써 몇 가지 직종을 바꾸면서 여기까지 버티어 왔다. 집안일만 하던 내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업이 바뀔 때마다 좌절하지 않았고 다시 일어서길 반복했다.
항상 새로운 일을 신기하게 받아들이며 언젠가는 잘 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일을 했다. 개척정신으로 살아가는 나를 보고 주변사람들은 활기차서 보기 좋다고 한다.
친구는 엄한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 숫기라곤 없던 내가 남에게 기대지 않고 살아가는 게 기특해서 가끔 농담을 던지곤 한다. “너를 잔디처럼 강인하게 만들어준 환경에 고마워하라.” 는 직언을 해서 한바탕 웃기도 한다.  
 
자랄 때 대농가에서 자랐지만 농사일은 하지 않았다. 바깥일 대신 어머니를 도와 가족들과 일꾼들 삼시세끼 밥해 먹이는 것만으로도 하루일과가 바빴다. 친구는 내가 자라온 과정에 비해 잘 헤쳐나가는 게 안심이 되어 농담을 했으리라. 여태 살아보니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도 영원한 보호자가 아니며 남편도 영원한 반려자가 아니다. 젊은 날부터 내 인생은 내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깨달았다.  
 
어느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약 네가 고위공직자의 아내였다면 안하에 사람이 없을 거다.” 맞는 말이다. 자라는 과정에서 무엇이 나를 교만하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내 안엔 알 수 없는 오만함이 서려있었다.
창조주는 나의 그 기운을 없애려고 가지를 꺾어주고 힘들게 살게 했는지 모른다. 요즘은 세찬 물살에 치어 풀이 많이 죽어 보이는지 “너는 옛날처럼 머리 까딱 쳐들고 다닐 때가 좋던데.” 라고 아쉬워하는 이도 있다.
웃자라는 가지를 쳐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지가 잘려서 수굿해진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당산나무를 보고 돌아와 베란다의 웃자라는 나무들을 사정없이 잘랐다.
“아파도 참아라. 너희들도 당산나무처럼 천둥 번개와 태풍을 이겨내며 긴 세월을 버티려면 웃자라는 가지들을 쳐주어야 한다.”

 

작가 연보/
작가 김수인(69)은 울산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2004년 『문학예술』로 등단했다. 이후 2005년 『수필과비평』신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수필과비평작가회 회원, 부산문인협회 이사, 부산수필문인협회 이사, 부산수필과비평작가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수필집으로 『객승』『달바라기』『방문객』이 있다. 
수상내역으로는 제14회 수필과비평문학상 수상(2014년), 제1회 부산수필문인협회 주최 ‘올해의 작품상’수상 <객승>(2010년), 제1회 민들레수필문학상 (2006년 에세이문예사 주최)이 있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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