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판화에 일본이 발끈했다.
중국 대변인이 일본의 후쿠시마원전 오염수 방류를 비판하는 패러디물을 SBS에 올렸다. 일본정부는 발끈했다. 원작은 에도시대의 화가 가쓰시가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아래〉다.
원작의 후지산을 원전으로 바꾸고 구름을 십자가로 한 다음 배에서는 어부가 방사능을 버리는 그림이다.
‘우키요에’가 세계에 다시 알려지는 계기도 되었다.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판화그림이다.
‘우키요에’란 말은 ‘떠다니는 세상’ 또는 ‘덧없는 세상’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런 세상이니 신나게 살아보자는 생각도 있는지 우키요에의 그림은 속세의 이모저모를 담아낸 그림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실제로 유곽의 기녀, 스모선수, 역사적 사건, 춘화, 서민 생활, 풍경화, 정물화 등을 담았다. 이런 우키요에를 제대로 소개한 책이 있다. 오쿠보 준이치가 소개한 『우키요에』다.
머리말에서 그는 ‘우키요에는 일본미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장르이다.
(· · ·)일본 밖에서는 우키요에가 일본미술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히로시게의 판화가 근대 유럽회화와 공예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우키요에에 관한 연구도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해 일본에 역수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썼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키요에에 반한 것은 유럽사람들이었다. 분명한 선, 대담한 구도, 화려한 색채를 보고 고흐는 테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1886년이다.
“나는 모든 일본예술품에서 보는 것처럼 순수하고 극단적인 명료함을 원한다. 요것은 결코 단조롭거나 경박하지 않다. 마치 옷의 단추를 끼우는 것처럼 단순하고 손쉽게 몇 개의 분명한 선으로 형상을 만든다.”
그리고 자기 작품은 하나 판 그가 우키요에를 사서 모았다. 477점이다.
그의 자화상에 일본풍이 있고 〈탕기 영감의 초상〉 배경엔 우키요에를 그렸다. 일본적인 감각과 정서를 배우려는지 안도 히로시케의 〈가메이도의 매화〉를 고흐는 그대로 유화로 그렸다. 〈꽃핀 매화나무〉다. 〈오히시와 아타케의 천둥〉은 〈비 내리는 다리〉로 이름붙였다.
▲ 우키요에를 모방한 고흐의 〈비 내리는 다리〉(오른쪽)
이렇게 유럽에 영향을 준 우키요에는 어떻게 유럽에 알려진 것일까?
당시 유럽은 동양의 도자기에 환호하고 있었다. 중국의 도자기는 유럽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뜨거운 인기를 갖고 있었다.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하는 도자기를 운송할때 깨지지 않게 하는 완충재로 종이를 썼는데 우키요에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판화를 접한 유럽의 화가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의 이국적이고 화려한 색채, 단순한 선이 주는 아름다움에 빠져 일본열풍이 일고 일본작품 소장에 열을 올렸다.
‘자포이즘’이다. 고흐만 좋아한 것이 아니다. 마네, 모네 마티스, 르누아르, 드가, 크림트 등 당대의 화가들이 다투어 일본그림에 빠졌고, 그렸다.
음악가 드뷔시는 호쿠사이의 그림에 영향을 받아 교향시, 〈바다〉(1905)를 작곡했다. 보스턴 박물관과 5만점, 푸쉬킨 박물관과 3만점 등 각 나라의 박물관에 수두룩하게 있는 것이 우키요에다.
▲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이 책은 1. 우키요에의 흐름 2. 우키요에 판화의 장르 3.겹쳐진 주제와 숨겨진 주제 4. 우키요에 판화 제작과 판매 5. 우키요에 판화의 여러 기법 등으로 전개되었다.
목판의 기술은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에 걸쳐 최고도의 발달을 보였다. 인물의 얼굴로 드리운 세 가닥의 머리카락의 1밀리미터의 폭에 있다. 복잡한 줄무늬 옷 등 정교한 기법이 두드러진다.
▲ 게이사이 에이센의 '비엔센조코 아사쓰유'
풍경화에선 서양회화에서 빛에 대한 감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황혼이나 밤의 등불 등을 활용하여 부드러운 빛에 감싸인 풍경을 그려냈다.
▲ 쓰키오카 요시토니의 '달빛 아래 피리를 부는 후지와라노 야스마사'
▲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후가쿠 삼십육경 고슈 가지카자와'
멀리 보이는 후지산과 어부의 머리를 정점으로 그물과 바위가 만들어낸 삼각형 구도의 안정성과 조화를 이루어 늠름한 기상과 품격을 자아낸다.
그림에 남색이 많이 들어갔다. 18세기 초반에 베를린에서 개발된 화학안료다. 베로아이라 불리는 이 푸른색 물감의 이름은 ‘베로’, 즉 베를린에서 따온 것이다. 그 후 남색 풍경화가 정착되어 많이 그려졌다.
▲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니시키오리 우타마로 가타신모요 유카타'
‘무엔즈리’ 기법으로 그린 이 그림은 옷의 윤곽선을 없애서 직물의 질감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여름옷이 맨살에 닿는 기분좋은 느낌을 받는다.
고전문학에 관련된 그림 〈오센의 도주〉는 우리나라 신윤복의 〈월하정인〉을 생각나게 한다.
젊은 남자가 아가씨를 업고 가을풀이 우거진 들판의 시내를 끼고 달리는 모습이다. 『이세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남자가 몇 년에 걸쳐서 구혼했던 여성을 결국 밤에 납치한다는 이야기다.
▲ 신윤복의 '월하정인'
▲ 스즈키 하루노부의 '오센의 도주'
우키요에 판화 제작과정을 그린 것도 있다. 직인들의 모습을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바꾸어 그린 일종의 미타테에다.
호리시의 작업장을 묘사한 작품이다.
실제로는 한곳에 모이지 않고 저마다 따로 작업했다. 작업대에는 파내고 남은 찌꺼기를 정리하는 브러시와 둥근 끌, 화면 오른편 아래쪽의 직인은 숫돌로 조각칼을 갈고 있다.
▲ 삼대 우타가와 도요쿠니의 '이마요미타테 사농공상 직인'
▲ 삼대 우타가와 도요쿠니의 '이마요미타테 사농공상 상인'
그럼 몇 장이나 찍었을까? 얼마나 찍었으면 도자기를 싸는 종이로 썼을까?
일반적으로 쇼즈리는 200매를 찍고 잘 팔리면 더 찍었다. 우타가와 사다히데의 〈후지산 기슭에서 행한 몰이사냥〉은 장당 8000매를 팔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리즈물이니 40만8000장이다.
당시 에도 인구가 100만명, 인구로 환산하면 판화 한 점을 약 100만장이나 찍었던 것이다. 호리와 스리의 시스템이 있어 가능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엉뚱한 궁금증이 생겼다. 일본이 이토록 많은 판화그림을 찍어낼 무렵 그들은 어떤 종이를 사용했을까? 우리나라의 닥나무로 만든 종이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도자기를 싸면서 유럽에서 유명해졌다는 우키요에를 알아보면서 일본의 도자기를 더 알아보고 싶었다.
아울러 일본의 도자기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삼평에 대한 궁금증도 더해졌다.
신분제에 묶여 예술가들을 홀대했던 조선, 쇄국정책으로 나라밖에 눈을 돌리지 않았던 조선과 개항을 하고 무역로를 개척하여 세계로 나갔던 당시의 일본을 생각해 보았다. 우키요에를 읽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