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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초 추모제... 묘역을 정비하고 마음을 다하여 추모하다

5월1일 천안문인협회 주관

등록일 2021년05월02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천안 문인협회는 해마다 4월에 운초 추모제를 한다. 올해는 5월 1일에 했다. 훼손된 경계석을 정비하느라 1주일 늦었다. 비가 오니 나무은 환호성을 내는데 문인들은 우비를 입고 산에 올랐다.
 

▲ 산 입구에 들어서서

조금 오르다 보니 김부용 묘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팽개쳐진 듯 흉했다. 올해는 묘역을 정비했으니 오르는 길과 안내표지판을 손봐야 한다는 의논을 하며 올랐다.
 

▲ 낡은 김부용 묘 안내표지판

산길에 질경이가 많다. 풀숲에 웃자란 질경이 두어 개도 보인다. 생명체들이 살고 싶어 하는 좋은 환경에서는 경쟁이 심하기 때문에 경쟁을 피해서 밟히는 길에 밀려 나와 산다.

질경이가 처음부터 밟히며 살고 싶었을까 하는 수 없이 적응하며 산다. 잎이 넓지만 , 밟아도 쉽게 상처를 입지 않는다. 잎 속에 백색 실처럼 잎 줄이 있고 튼튼한 유관속 다발이 있기 때문이다.

풀숲에 끼어 존재 없이 자라는 것보다 고난을 받더라도 자유롭게 지경을 넓히고 사는 것을 택한 듯하다. 왜 그 순간 기생의 삶을 살았던 운초 부용이 떠올랐을까?
 

▲ 밭길을 따라 자라는 질경이.   

마음이 통했는지 문우한 분이

“운초를 추모하러 가는 우리를 반기려고 초록 카펫을 펴셨네요.” 

제물과 행사물품을 들고 헐떡거리며 가던 문우들이 걸음을 멈추고 웃었다.
              

운초를 떠올리며

운초 김부용은 성천 출신이다. 황진이, 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시기(詩技)로, 허난설헌 신사임당과 함께 3대 여류시인으로 분류한다.

350여 수나 되는 한시를 남겼다. 비슷한 처지의 여성과 ‘삼호정시사 (三湖亭詩社)를 만들어 시와 음악을 주고받았다. 여성 최초의 문학단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여류 화가나 여류 작가가 자기 이름으로 활동하기는 조선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드문 시대였다.
 

연천 김이양의 족적

나이를 초월한 사랑을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본다. 진정 사랑이었을까? 편안하게 몸을 의탁하기 위한 구실이었을까?

운초의 경우도 김이양 대감과 나이 차이가 거의 50년이 넘는다. 안동김씨 김이양은 (1755-1845. 영조 31∼헌종11) 천안 광덕출신이다.

둘째 아들이 순조의 딸 명온공주와 혼인해 동녕위에 봉해졌다. 김이양은 40세때 (1795년. 정조 19년)생원으로 급제한 후 1812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고장 주민들의 민생고 해결에 노력했다.

이듬해 변경지방 군사제도를 시정토록 건의했다. 1815년 임금과의 대화를 통해 국경지방 군사제도의 개선을 주장하고 허락을 받았다.

같은 해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다음 해 호조판서가 되어 세제 및 군제의 개혁 화폐제도의 개선을 주장했다.

1819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다음 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844년 만 90세가 되어 궤장이 하사 되었고 다음 해 봉조하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는 중추부영사에 추증되었다.
 

운초, 연천 김이양을 만나다

다시 운초 김부용를 보자. 1812년 평안도 성천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김부용은 4살에 글을 배우고 10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했다고 한다. 그해 아버지를, 다음 해 어머니를 여읜 후 퇴기의 수양딸이 되어 12살에 기적에 올랐다. 15살에 시문과 노래, 춤에 능통했다.

운초가 연천 김이양을 만난 나이가 19세라고 전해진다. 운초가 김이양을 만나게 된 일에는 성천 부사가 거론된다.

김이양이 평양감사로 부임하자 성천부사는 김이양을 환영하는 자리에 운초를 데리고 간다. 운초의 시문이 뛰어나 김이양과 잘 어우를 것을 안 것이다. 운초 역시 이미 연천의 시문에 빠져 존경하고 있던 차였다. 성천 부사가 김이양에게 운초를 거둬줄 것을 권하자 김이양이 자신은 나이가 많다고 거절했단다.

이에 부용은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입니까, 삼십 객 노인도 있고 팔십 객 청춘도 있습니다.”라며 답했다. 그러면서 ‘성수패설’에 나오는 ‘노랑유부(老郞幼婦)’를 읊었다.

‘열여섯 아리따운 신부에 일흔 둘 신랑/호호백발과 붉은 단장 마주하네/홀연히 한밤에 봄바람 일어나더니/하얀 배꽃 날아와 붉은 해당화를 누르네.’ 김이양이 답했다.

“나는 팔구랑(八九郞)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라고 하니 운초가 “소첩도 이팔가인(二八佳人)보다 세 살이 많사옵니다. 붉은 꽃이나 하얀 꽃이나 봄을 맞아 새롭게 피는 꽃은 다 같은 꽃이옵니다.”라 하여 원앙금침에 들었다고 한다.

그 후 김이양이 운초를 기적에서 빼내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서울로 돌아간 김이양은 운초를 소실로 맞이한 후 남산 아래 ‘녹천정’을 지어 운초와 시문을 지으며 살았다.

 

▲ 훼손된 경계석을 정비하고 있다.

비탈진 길을 오르니 운초 묘가 보였다. 훼손되어 마음 아팠던 곳이 깨끗하게 정비되었다. 나무 그늘에 가려 죽은 잔디도 새로 입혔다.


▲ 정비된 운초 묘 뒤에 시화가 전시됨.                        

다행스럽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운초 추모제가 시작되었다. 추모순서는

첫째마당- 추모제

둘째마당- 운초와 문학세계

셋째마당- 추모공연 및 전시

넷째마당- 담소 및 개인별 오찬 후 산행과 들꽃답사.

사회자의 안내로 내빈소개를 한 후 정인숙 지부장이 추모의 글과 함께 헌화를 했다.
 

▲ 정인숙 천안문협지부장의 헌화.

현남주 천안예총회장의 격려사가 이어졌다.
 

▲ 현남주 천안예총회장 격려사.

안수환 시인이 운초를 추모하며 쓴 시를 신군자 회원이 낭송했다.
 

▲ 신군자 회원의 헌시 낭송.

이어 추모 제례를 드렸다.

둘째마당에서 윤성희 문학평론가가 삼호정 정자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여성문학동아리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에 대한 것을 주제로 문학강연을 했다. 삼호정의 주인인 김금원이 14살의 나이로 남장을 하고 금강산을 유람한 후 한양을 둘러보았다는 것과 남편을 만나 삼호정 주인으로서 운초, 경산, 박죽서, 경춘 등과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주고받은 일에 관한 것이었다.
 

▲ 윤성희 문학평론가 강의.

이어서 이정우 충남문협 회장이 ‘운초 추모제의 어제와 오늘’이란 주제로 운초 추모제의 역사를 밝혔다.

1974년 6월 30일 조선일보에 ‘잡초만 무성한 부용의 묘’라는 이상현 기자의 취재 기사가 실렸다. 태화산 기슭에 흔적 없는 봉분, 길고 긴 풍마로 봉분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을 정도의 무덤이라 했다. 천안역 앞 동방서적 회장 김성열 사장은 기사를 들고 광덕면에 사는 서상옥 노인과 운초 묘역을 찾아냈다.

그해 가을이었다. 시인 안수환, 시인 김명배 등을 중심으로 봉분 조성과 추모사업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천안문인협회도 함께하기로 힘을 모았다. 운초 추모제의 시작이었다.

초혼시는 안수환 시인이 지었다. 또 추모제와 함께 운초시 연구와 번역 작업도 병행했다. 평민사에서 운초 김부용 시집 출판이 진행되었다. 김성열 회장이 운초시 전작 번역과 운초시 연구를 의뢰하여 여러 자료들이 편찬되었고 정비석 글, 인영선 글씨로 묘비가 세워졌다.

그 후 천안문인협회가 주관하고 추모사업회가 후원하는 추모제가 매년 4월에 운초 묘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2009년 천안예총에서 묘역을 보수하고 안내판을 재 설치하였다.
다시 훼손된 경계석과 잔디를 2021년 4월에 보수하고 5월 1일 운초 추모제를 지내게 되었다.
 

▲ 이정우 충남문협회장의 강의- 운초 추모제이 어제와 오늘.

셋째마당으로 그동안 해왔던 추모연극, 다례, 추모 노래와 춤, 연주는 코로나19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취소되고 회원들이 부용의 시를 낭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박상분, 유인순, 서미경, 원경재, 김용순 회원의 낭송이 이어졌다.
 

     ▲ 박상분 회원의 운초 시낭송.


잠 못 이루는 외로운 밤/

아름답게 임 그리네/

벌레 울음소리 이별 후 더욱 섧고/

차가운 등불 밑에 방은 비어 적막커늘/

들에는 바람 없고 한낮에도 문 닫으니/

가슴 가득 치민 정을 누구에게 말하리오
 

▲ 유인순 회원의 운초시 낭송.


태화산 봄빛 그리더니/

영감님 모신 일 일마다 유별하다/

산에는 바람 불고 끝없이 내리는 비/

잔잔한 시냇물 가없이 흘러가고/

바위꽃 피고 지고/세월을 모르누나
 

▲ 추모를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행사를 모두 마친 후 회원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은 것으로 운초 추모제가 끝났다.

다행히 비가 그쳐 추모제를 올리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쉬움이 남았다. 운초 묘역은 정비되어 찾는 이가 많은데 운초가 죽으면서 김이양 대감 옆에 눕게 해 달라며 평생 사모하던 대감의 묘는 손보는 이가 없어 훼손이 심하다고 한다.

운초의 마음이 편할까?

김다원 리포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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