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산에 갔다. 눈 덮인 산길을 맨 처음 걸어보고 싶었다. 산은 지난밤 내려쌓인 눈으로 은백의 설경을 이루고 있다. 발에는 아이젠, 손에는 스틱, 두터운 방한복 차림으로 몸을 감싸고, 모자에 마스크를 썼다.얼어붙은 눈들이 서릿발처럼 곧추서 발을 딛을 때마다 사박사박 저벅저벅 살얼음 부서지는 소리를 낸다. 바람에 몰린 눈들이 상수리나무 밑동에 하얗게 붙어 있다.
“벽오동나무 밑동을 적시는 가을비”
박용래 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난다. 얼어붙은 아침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뜨거운 입김. 푸 - 푸, 헉헉대며 산을 오른다. 잘못 짚은 스틱에 미끄러져 몸이 휘청한다. 어려서 외풍이 심했던 시골집, 물 대접을 머리맡에 놓고 자면 다음 날 그 대접이 터져 있었다. 문고리가 쩍쩍 달라붙는 아침, 자고 일어나 외양간에 가 보면 되새김질 하는 소의 턱에 고드름이 맺혀 있었다. 그땐 그토록 추웠다. 뼈 속까지 아렸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그렇긴 해도 요즘도 추울 땐 몸이 저리게 춥다. 군데군데 소나무들이 부러져 있다. 내려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줄기 한가운데가 와지끈 부러진 것이다. 겨울 산에 때 아닌 솔향기가 묻어난다. 배고픈 산새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며 난다.
아차,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크다. 오늘따라 주머니에 아무 것도 넣어오지 않았다. 눈이 오면 산짐승들 먹이가 눈에 덮여 굶주리게 마련. 빵부스러기나 야채 과일 따위를 가져다 양지 바른 곳에 눈을 헤치고 놓아주곤 했는데, 오늘은 그냥 잊고 나온 것이다. 딱새 몇 마리가 잡목 가지에 앉아 빈 부리질을 하고 있다. 언 바람이 맵차게 얼굴을 할퀸다. 장갑 속 손가락 끝이 곱다. 차츰 몸에 열기가 오른다. 이제부터 산행이 제 궤도에 오른다. 오르막길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스틱을 짚고 발가락에 힘을 주어 몸을 앞으로 민다.
하얀 눈밭에 나무들이 바늘처럼 꽂혀 있다. 잎이 다 져 앙클한 나뭇가지들.
겨울 산이 가을 산보다 더 텅 비었는데도 가을 산보다 오히려 덜 쓸쓸하다. 눈 때문일까? 떨어져 쌓인 낙엽 때문일까? 이불처럼 하얗게 덮인 눈 밑에는 부엽토가 되어 뿌리로 돌아가는 나뭇잎들이 있다. 한여름 광합성 작용을 하면서 나무를 한껏 위로 들어 올린 잎 잎들.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진 붉고 노란 잎들. 숲의 바다에서 물고기처럼 헤엄치던 나뭇잎들이 지금은 눈 밑에서 한 해의 순명을 다하고 있다.
겨울 산에는 굶주린 짐승들이 있다. 겨울 산에는 적요의 속살이 있다. 겨울 산에는 봄 여름 가을 이어온 물상(物象)들의 변전이 있다. 혼자 산행을 하다보면 조용한 감회가 수없이 밀려온다. 몸은 달아올라 씩씩대지만 정신은 맑다. 차고 고요하다.
조재도 | 시인이자 아동·청소년문학 작가입니다. 충남의 여러 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지금은 ‘청소년평화모임’ 일을 하고 있으며, 어린이와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