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천안 예술의전당으로 봄나들이를 갔다. 천안문화재단과 천안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하는 해정 전영화 ‘천안을, 보다’ 그림전시회가 3월16일부터 열리고 있었다. 4월18일까지 열리는 해정의 특별전이다.
스틱을 잡은 사진속의 작가는 얼른 만나지 않으면 안될 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출생이 궁금했다.
1929년생, 2021년에서 보면 92세다. 천안농업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서세옥, 민경갑 등 서울대학교 출신의 동양화가들과 묵림회(1961-1964)를 결성해 한국 미술계에서 수묵 추상의 경향에 큰 영향을 준 화가다.
그의 작품 ‘이른 아침’ 앞에 섰다. 1975년 한지에 먹과 채색의 가로가 긴 작품이다. 깨어나지 않은 것들은 어두운 색을 묻혀 찍은 듯했다.
햇살을 받은 풀들은 청록색이다. 주변에 이미 빛이 들어 땅이 기지개를 켜는 듯 밝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발 앞의 풍경을 쪼그리고 앉아 내가 관찰하는 듯했다.
옆으로 이동하니 이번에는 너른 보리밭이 펼쳐졌다. 파랗게 자라는 보리와 흙이 보이는 긴 이랑이다. 여기에 무지개색을 사선으로 꽂았다.
너른 보리밭을 보니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것일까. 그의 작품을 보며 그에게 영감을 준 근원을 생각했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이 농촌이다. 자연이 그의 삶에 가장 많이 들어있는 듯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는 우리 것에 자기의 철학, 동경, 자신의 삶을 한지와 오방색, 먹을 이용해 캔버스에 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추상이지만 친근한 느낌이 오는 것은 아닐까.
발그레한 색에서 삐져나온 한지의 속살로 자연스럽게 가던 손가락을 얼른 오므렸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그의 또다른 작품 앞에 섰다. 1995년 작 ‘오대양 육대륙의 평화’와 ‘오대양 육대륙’이다.
두 작품에 공통점이 있다. 그림 아랫부분엔 넘실대는 파도가 있다. 그 위에 굵은 먹으로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 산이 있다. 다만 ‘오대양 육대륙의 평화’에는 산 위에 녹청색의 둥그런 선이 산을 덮고 그 위에 푸른 하늘이 깊다.
아마도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후 도약하는 우리나라의 힘을 느껴서일까? 게다가 해외여행 자율화로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린 시기였다.
국외의 상황은 큰 변화가 있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것이다. 날카롭게 대립하던 세계가 평화의 무드로 변해가고 있었다. 작가는 희망을 본 듯 오대양 육대륙을 연이어 그렸다.
세계를 평화로 품고 싶다는 설렘이 그의 그림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그 후 그는 해외전시와 벨기에 켄트대학교 초빙교수 등을 하면서 인류의 평화, 우주, 내면의 세계 등 다양한 면을 그려왔다.
1954년부터 총 9회의 국전 입상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교사 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고향인 천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의 작품이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서울 시립미술과, 제주 기당미술관, 이천 시립 월전 미술관 등에 전시돼 있다. 또한 해외에서는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뉴욕 첼시센터, 일본 후지TV사, 독일 뮌헨 SM사, 벨기에 등에 다수 있다.
그의 약력을 적을 때의 일이란다. ‘천안 농업고등학교 졸업’을 빼자고 했더니 안된다며 고개를 젓더란다. 그의 고향사랑을 보는 대목이다.
천안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 해정 전영화의 그림을 보고 온 날. 캔버스에 검붉은 색으로 일렁이던 그의 열정과, 너른 보리밭에서 보던 그의 고향과, 넘실거리는 대양과 우뚝 솟은 대륙을 품은 그의 가슴이 밤을 넘어 이른 아침까지 내 마음에서 울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