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 앞에선 늘 두렵다. 사랑도 그런가?
눈이 오기 전에 구름이 하늘을 덮듯 그와 나 사이에도 전조가 있었다. 첫 학교 옆에 하숙집을 잡았다. 몇 년 사용하다 버릴 옷장을 나무로 된 것으로 살 이유가 없었다. 비닐 옷장을 사서 시장을 나오는 길에 그를 만났다. 출근한 지 며칠 되지 않아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 총각 선생님이었다. 내 짐을 보자 버스정류장까지 짐을 옮겨 주겠다고 했다. 조금 멈칫했으나 마다할 처지가 못 되었다. 무거운 가방에다 비닐 옷장은 부피가 컸다. 그는 버스에 올라 안전하게 옮겨주고 갔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11월의 첫눈은 내려앉기 미안한 듯 신작로에 살포시 깔렸다. 까치발로 조심조심 다가오는 아이처럼. 그도 그렇게 내 옆에 섰다. 다른 학교로 발령을 받아 새로 출근할 학교를 확인하러 가는 날, 제대로 가고 있는지 두근거리는 마음 옆에서 그는 흑기사처럼 버스기사에게 00학교 앞에서 내려달라고 연거푸 말했다. 하얀 눈에 첫 발자국을 찍었던 추억처럼 남은 장면이다.
그는 우리가 데이트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볼까봐 신경썼다. 만일 결혼을 안 할 경우 남자는 별일 아니지만, 여자인 경우엔 조신하지 않은 여자라고 뒷말 들을 것을 염려했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말 한마디에서도 나를 배려하는 그에게 마음이 갔으나 또 다른 사람이 올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을 장소를 찾아간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발걸음을 옮긴 것인지 알 수 없다. 첫눈이 폴폴 날리는 망향의동산은 쓸쓸하고 추웠다. 앞서 천천히 걷던 그가 돌아서며 내 손을 잡았다. 반지도 없었고 무릎도 꿇지 않았다. 그러나 진지한 그의 눈동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 위엔 아이들 발자국과 내 발자국이 그의 옆에 어수선하게 있다. 그리고 자전거 바퀴가 낸 완만한 곡선이 아름다운 그림인 양 그 위를 지났다. 삶으로 그리는 그림은 거짓이 없다. 아이들의 발자국은 커졌고 자전거 바퀴는 자동차 바퀴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멀리 갔다. 눈 위에 찍히는 발자국도 드물어졌다.
이제 그의 발자국이 더는 눈 위에 찍히지 않는다. 함박눈이 그의 발자국을 덮었다가 햇살이 물기마저 하늘로 가져갔다고 위로한다. 그러나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던 아이들이 아버지가 되고, 그 뒤를 아장아장 걸음이 뒤따른다. 또다시 세발자전거는 눈 위에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고 나는 그 그림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다.
12월이다.
하늘은 구름을 만들고 머지않아 첫눈이 올 것이다. 눈이 오면 그대와 걷던 발자국을 찾아 버스를 타고 싶다. 기사에게 정중하게 내릴 곳을 확인하던 그의 음성을 안고 그같이 물어보고 싶다. 그를 안고 가는 길 내내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흐느끼는 울음이 눈으로 변하여 길을 가리도록 내렸으면 좋겠다.
▶ 시인 김다원(64)은 역사를 전공한 교사출신으로, ‘허난설헌 문학상’과 ‘천안시 문화공로상’을 받았다. 지금은 천안수필문학회 회장이자 충남문인협회 이사, ‘수필과 비평’ 충남지부장을 맡고 있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첫시집 ‘다원의 아침’에 이어 ‘천안삼거리’, ‘보내지 않은 이별’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