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의 작가 도널드 홀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살던 고향 마을에서 파티가 있었답니다. 그의 마지막 시집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였지요. 그가 낭송하는 시를 들은 후 83세의 작가에게 사람들이 너도나도 말했답니다.
“우리 어머니가 당신에게 불어를 가르치셨어요!”
“우리 할아버지께서 당신 할아버지 밑에서 일하셨어요!”
“당신 아버지께서 직접 내게 이 책을 주셨어요!”
그날 그는 백악관 행사만큼 행복했다고 책에 썼습니다.
그가 부러웠습니다. 하버드대를 나왔고 40여 권의 책을 썼고 계관 시인이었다는 것도 부럽지만, 그가 어릴 때 놀았던 고향에 많은 사람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는 것이 더 부러웠습니다. 그도 150년 동안 가족의 터전이었던 곳에서 89세의 나이에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저도 자주 고향을 생각합니다. 문득 생각나 찾아간 고향에서 마을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어린 날 늘 바라보던 산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트랙터를 몰고 가는 이가 저기가 ‘배미산’이라고 두 번 말할 때도 믿기지 않아 입을 멍하니 벌리고 산을 보았습니다.
뻐꾸기 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던 산이 황소 한 마리 건너편에 앉아 있는 듯이 낮았습니다. 콩밭을 지나고 논을 지나 정숙이네 집에 가던 길도, 온종일 햇살이 하얗게 떨어지던 미자네 마당도 바둑판처럼 정리되어 공장용지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떠났습니다.
드디어 우리 집터를 찾았습니다. 탱자나무와 측백나무 울타리 안에 백매화가 하얗게 피어있던 뒤란도 없었습니다. 칼싸움하려고 고드름을 따던 돼지 막도 없었습니다. 그 대신 빨간 기와가 올라간 양옥집이 길옆에 돌아앉아 있었습니다.
익숙한 것이 있을까 찾던 내 눈에 벚나무가 눈에 띄었습니다. 산모롱이 돌아 이웃집으로 가는 길에 버찌를 따고 싶어 발을 올리던 나무였습니다. 고향에 와서 고향을 찾느라 탄 내 마음같이 나무는 까만 몸만 남아 있었습니다.
추석빔을 입고 대문 앞을 오락가락하던 9살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풍년이 들고 행복이 들라고 마당으로 부엌으로 꽹과리와 북이 자지러지면 징이 들뜬 마음을 지그시 누르던 소리가 아직도 쟁쟁한데, 북채 놓고 막걸리 들이켜던 그 사람들은 없습니다.
“나를 기억하세요?”라고 묻는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의 파트너를 도널드 홀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내 고향에선 나를 궁금해 하는 사람도 내가 물어볼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디들 계신가요?”
▶ 시인 김다원(64)은 역사를 전공한 교사출신으로, ‘허난설헌 문학상’과 ‘천안시 문화공로상’을 받았다. 지금은 천안수필문학회 회장이자 충남문인협회 이사, ‘수필과 비평’ 충남지부장을 맡고 있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첫시집 ‘다원의 아침’에 이어 ‘천안삼거리’, ‘보내지 않은 이별’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