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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또다른 길, 건망증

천안 윤성희- 수필가이자 문학평론가

등록일 2020년09월17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젊은 때는 잘 못 느꼈는데…….”
 

나도 모르게 가끔 이렇게 구시렁거릴 때가 있습니다.

소화불량이라는 걸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체기를 느낄 때, 무언가를 기억해내는 데 머릿속을 한없이 더듬적거리게 될 때 ‘옛날에는 어쩌구…’를 반복합니다. 당연한 변화인데 말입니다.

사물 이름이나 낱말 하나가 생각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해집니다. 마음의 눈에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훤히 보이는데, 그걸 언어로 생각해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아예 가물가물하다 그냥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재채기가 막 터질 듯 터질 듯하다가 제풀에 스르르 가라앉아버릴 때처럼 말이죠.

요즘은 책을 좀 읽는 편인데, 이게 또 계속 이걸 해야 하나 하는 회의에 빠지게 만듭니다.

읽은 내용이 며칠이면 송두리째 새어나가 사라지고 말거든요. 밑줄까지 치고 어떤 것은 옮겨 적기까지 했는데도 머릿속에서는 며칠에 한번 대청소라도 했는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거예요.

어릴 때 왜, 잘 외워지지 않는 것은 컨닝을 해보려고 작은 쪽지에 깨알같이 적어 숨겨두는 일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것이 모조리 사진처럼 찍혀 굳이 컨닝 따위 낯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요.

독서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기억력이 버텨주질 않아요. 어떤 때는 읽은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아서 가지고 있는 책을 새로 또 산 일도 여러 번 있을 정도예요. 그래서 공부도 다 때가 있다, 그러는 모양이에요.

그럴 때마다 콩나물시루를 생각하며 마음을 토닥이곤 합니다. 물을 주면 빠져나가고 말지만 어느새 콩나물은 그 물로 몸을 적시며 훌쩍 자라고 있거든요. 나 역시도 부지런히 읽다보면 내 정신의 콩나물이 조금씩은 자라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떤 신경심리학자는 자기 기억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면 그게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새로운 것을 더 이상 배울 수 없다고 스스로 확신하면서, 새로운 기구의 사용을 식구들에게 내맡기고, 책 읽는 것도 포기하며 결국에는 더 이상 무언가를 배우거나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가끔 그런 사람 주변에서 보잖아요? 변화를 인정해야지요. 자기 기억을 불신할 것이 아니라 망각은 노화의 자연스런 단계임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러면서도 망각은 인지 기능의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해요. 그러니 노인들만 건망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끊임없이 잊어버리며 살고 있잖아요.

70세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17세의 학생도 자기가 왜 방에 들어왔는지 까먹어요. 그래서 나는 망각이든, 기억력의 쇠퇴이든,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현상임을 믿기로 했어요.

기억력이 아주 비상한 초등학교 때 친구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얘기를 하다보면 이 친구는 초등학교 시절에 일어난 일을 영사막처럼 펼쳐놓고는 자세히도 얘기해요.

아무개는 교실 창틀에 올려두었던 제라늄 화분을 축구공으로 깨트려서 복도에서 한 시간이나 손을 들고 벌을 섰다느니, 숙제를 안 해 온 아무개를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따귀를 몇 대 무지막지하게 때렸다느니, 자기는 그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느니 하면서 별걸 다 기억하고 있는 친구지요.

쓸데없는 것 좀 고만 잊어버리고 살아라, 하면서 지청구를 하지만 기억의 사진첩에 촘촘히 박혀 있는 사진들을 그 친군들 어쩌겠어요. 그 친구가 안 돼 보이는 것은 선생님에 대한 나쁜 기억이 너무도 강하게 각인돼 있다는 것이지요.

추억은 대개 아름답게 포장되기 마련인데 이 친구는 아름다운 장면들을 남보다 좀 덜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내 친구는 그래도 약과예요. 보르헤스의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라는 작품에서는요, 모든 것을 기억해서 불행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푸네스라는 소년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전신이 마비된 대신 아주 사소한 것까지 빼놓지 않는 엄청난 지각력과 절대적인 기억력을 얻게 됩니다.

가령 “포도나무에 달려 있는 모든 잎사귀들과 가지들과 포도 알들의 수”를 기억하고 있거나 “1882년 4월 30일 새벽 남쪽 하늘에 떠 있던 구름들의 형태”가 어땠는지를 기억하는 식이지요.

기억의 양이 엄청납니다. “나 혼자서 지니고 있는 기억이 이 세상이 생긴 이래 모든 인간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기억보다 더 많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푸네스는 가히 ‘기억의 천재’라 불릴 만하지요.

그런데 이게 비극입니다. 푸네스 자신도 인식하고 있듯이 그 엄청난 양의 기억들이 모두 ‘쓰레기더미’와 같다는 것입니다.

쓰레기더미와 같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무것도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뒤죽박죽이 돼서 이제는 그 기억들이 다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월화수목금토일, 하루하루를 다 기억하는 것보다 그 중 의미 있는 한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인생에서 더 중요한 일 아닐까요? 모든 쓰레기 목록을 다 기억하는 소년, 그것을 매일매일 일일이 꺼내보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의 절대적인 기억력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였습니다. 기억력 때문에 그는 한 순간도 편히 쉴 수 없었습니다. 절대적이고 완벽한 기억력은 절대 고통을 가져오는 장애에 불과했습니다.

『뇌의 문화지도』를 쓴 다이앤 애커먼이 한 말이 인상 깊습니다.

“뛰어난 기억력이라는 저주를 받은 사람들의 정신은 물건이 너무 많아서 흘러넘치는 벽장과 같다. 문을 열면 온갖 물건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져 나오는 벽장 말이다.”

이어서 또 이렇게 씁니다.

“망각은 기억의 부재가 아니라 기억의 동맹이다. 뇌가 민첩하고 분주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인 것이다.”라고요.

망각이란 뇌가 부지런하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쓰레기로 뒤덮인 길을 잘 정리정돈해주는 일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쯤 되면 망각은 생존을 위한 필수 기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이런 시는 또 어떤가요?

 
다람쥐의 건망증은 참으로 위대하다
다람쥐가 땅속에 묻어놓고 잊어버린
도토리들이 자라서 상수리나무가 되었다면
상수리나무가 이룬 숲과
숲이 불러들인 새울음소리,
모두가 다 다람쥐의 건망증 덕분이 아닌가
한겨울 눈이라도 내리면
파묻어논 양식을 도무지 찾지 못해
부르튼 두 손을 부비며 떨고 있었을 다람쥐
그 차디찬 시장기에 가슴 한쪽이 찌르르 아파오긴 하지만
다람쥐의 건망증 때문에 세상은
그나마 간신히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양볼이 뽈통하게 튀어나오도록 양식을 거두고
언젠가 고 작은 손이 부르트도록
땅속 깊이 심어놓은 한 톨 위에 올라가 무심히
뛰어놀고 있는 다람쥐,
제가 본 세상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어
자신의 기억 한쪽을 애써 지워버렸나보다


                  ―손택수, <다람쥐야, 쳇바퀴를 돌려라> 전문
 

손택수 시인은 한술 더 떠 망각예찬론자가 됩니다. 건망증이 우주적인 질서에 기여를 한다는 것이지요.

천진한 다람쥐 이야기 아마 들어보셨을 거예요. 다람쥐가 양 볼 한가득 도토리를 물고 숨길 곳을 찾다가 마침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을 보고 ‘옳거니, 여기다 묻자’ 하고선 흰구름을 표지 삼아 그 밑에 묻었다나요.

그 후 흰구름은 어디론가 흘러갔을 것이고 다람쥐가 찾지 못한 구름 밑의 땅속에선 이듬해 도토리가 싹을 틔웠겠지요?

이 얘긴 물론 낭만적인 스토리텔링이죠. 그래도 실제로 다람쥐가 건망증은 좀 있다고 하네요. 가을에 밤, 도토리 같은 것을 주어다가 여기저기 땅 속 깊숙이 묻어 두는데 건망증 때문에 묻어 둔 곳을 잘 잊는다고요.

다람쥐가 못 찾는 열매가 95%나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아마 과장일 거고, ‘상당수’ 정도를 못 찾는다고 봐야겠지요. 그 못 찾은 씨가 나중에 눈이 터서 나무로 자라는데, 그 나무가 마침내 숲을 이루고 그 숲이 또 새를 불러들인다는 것, 이것이 손택수 시인의 시를 떠받치는 상상의 기반입니다. 이 시를 통해 우리 모두가 떨쳐내지 못하는 망각의 불안증을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시에서처럼 위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건망증, 망각, 크게 걱정하거나 상심할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수치스러웠던 일에 대한 기억, 이별과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쓰리고 아픈 상처와 좌절의 시간들을 젊을 때의 총기를 발휘해서 모두 끌어안고 소환해야 할까요?

슈바이처 선생이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좋은 건강과 나쁜 기억력에 다름 아니라고요. 잊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이죠. 어차피 그건 낙엽이 지는 것 같은 순리이기기도 하고요. 때가 되면 그렇게 견고하게 붙어 있던 나뭇잎도 낙엽 되어 떨어지잖아요.

우리 기억들도 머릿속에서 떨어져 나가는데 의미 없는 것들부터 하나하나 털어내야 돼요. 그러고 나면 소중한 것만 남을 테지요. 낙엽이 지면 산속이, 세상이 훤히 보이잖아요.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나면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그러니 잊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기로 해요. 오히려 잘 잊기로 해요.

독일의 법학자인 레오 로젠베르크가 이런 말을 했어요.

“처음엔 이름, 그 다음엔 얼굴을 잊는다. 그런 다음, 지퍼를 올리는 것을 잊는다. 그리고 지퍼를 내리는 것을 잊는다.”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되는데, 지퍼를 내리는 것을 잊으면 큰일 나요. 우리 마지막 순간에 이를 때까지 그것만은 부디 잊지 않기로 해요.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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