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명을 결정하는 회의가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는 소회의실 전경.
“고속철 역사명이 지금 막 천안아산역으로 결정됐습니다.(아산팀과 시비 생기지 않도록) 조용히 나갑시다.”
지난 23일(수) 오후 4시55분. 과천 건설교통부 4층 소회의실에서 건교부 산하 고속철도역명칭지명위원회(위원장 도수희)의 3차 회의 2시간여만에 경부고속철도 첫 기착지 역사명(제4-1공구)이 ‘천안아산역’으로 결정됐다. 소식을 접한 천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아산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전경이 연출됐다.
당초 15명에서 한 명이 불참한 지명위원회는 김용래 아산위원마저 회의 도중 밖으로 나가 기권으로 처리됐다.
회의는 3번의 정회와 함께 3단계로 분석된다.
처음에는 천안과 아산 2개씩의 지명을 비롯해 총 8개의 후보지명이 거론됐으나 ‘최종 결정하는 자리에서 8개가 올라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지배적인 의견에 정회됐다.
두 번째는 천안이 주장하는 신천안역, 천안아산역에 아산이 주장하는 장재역과 현충역이 어떠냐고 제안했으나 지명위원회 위원장이 “현충역은 당초 거론되지도 않았다”고 반박해 무산됐다.
마지막으로 제안된 건 천안아산역과 아산천안역이라는 절충안. 아산위원이 표결없이 아산천안역으로 해달라는 주장과, 아니면 건교부, 철도청, 고속철도공단 위원에 대한 공평성을 의심, 표결에서 빼달라고 거부했으나 뜻대로 안 되자 회의장을 나간 것으로 전해졌다. 회의는 강행됐고 결국 13명의 위원들이 표결처리, 8명이 천안아산역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장상훈 천안시의회 의장은 “아쉬움은 있으나 양 시측 명이 함께 들어가 서로간 위안되지 않겠냐”는 소감을 밝혔으나 김상남 아산시의회 의장은 “공사 저지 및 아산역 사수를 위해 전 시민역량을 결집시켜 싸워 나가겠다”고 피력했다.
한편 그동안 첨예하게 대립하며 자기 지역명만을 관철시키려 했던 것과는 상당히 양보된 역명 선택이라는 점에서 결과를 따지기 전에 ‘양 시의 승리’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으나 결정된 역명만 바라보면 썩 내키지 않는다는 게 양 시민들의 지배적 여론이다.
천안아산역이 뭐꼬!
모두들 천안아산역을 반겨하진 않는다. 행정지명을 죽 열거한 조잡한 역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섯자는 부르기도 번거롭고 중간에 한번 끊어 읽혀져 탐탁지 않은 지명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아산역이나 신천안역으로 결정됐을 때의 양 지자체간 불화는 파란을 예고하므로 현실적인 견지에서 이번 결정이 차선책이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천안측은 “결국 아산이라는 꼬리표는 떨어질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위안이다. 아산역이나 장재역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말이다. 아산측은 천안명과 아산명이 반씩 섞였지만 결국 천안역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서 섭섭함을 지울 수 없는 상태다.
천안사람 이모씨(35?신방동)도 천안아산역으로 정해졌다는 소리에 “거지발싸개같은 이름”이라며 “신천안역이나 아산역중 양자택일을 할 것이지 이게 뭐냐”며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다. 또 김모씨(28?신부동)도 “우리(시민들)는 아산역이라 해도 상관없는데 왜 그리들 싸우고 난리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는다.
천안과 아산의 이해관계를 떠나 이번 역명은 전 국민들에게 한바탕 폭소를 자아낼 것으로 보인다. 지금껏 고속철도명과 관련해 일련의 과정을 밟아왔지만 천안아산역(또는 아산천안역)이 쌍방간에 원론적인 접근에서 언급된 것 뿐, 실제 상황으로 전개될 줄은 생각도 못한 것. 즉 솔로몬의 심판처럼 제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네에게 아이를 반으로 나눠 가지라고 한 것과 같은데 천안시와 아산시는 진짜 나눠 가진 것 아닌가.
천안아산역은 결국 역명의 머리가 된 천안이 승자처럼 보이지만 두 지자체가 모두 피해자로 남게 될 전망이다.
역명, 일단락된 것인가
신천안역이란 최선책은 처음부터 갖기 힘든 것으로 판단한 천안측은 차선책으로 선택한 ‘천안아산역’에 만족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천안측이라 함은 당일 건교부에 함께 올라갔던 시 공무원과 시의원, 지역기관 및 단체를 대표하는 개발위원회 위원들을 말한다.
그동안 신천안역을 주장하며 역명에 민감한 목소리를 높였던 천안측이 만족한 입장으로 봐서 천안시민 전체에서도 이번 결정에 그리 문제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산도 그런가. 일단 건교부에 올라갔던 시의원들이 결과가 발표되자 ‘제 집이 망한 것’처럼 핏대를 세우며 천안아산역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모든 것을 부정했다.
“앞으로 아산 시민들로 하여금 집회와 시위는 말할 것도 없으며, 우리 땅에 절대 공사는 진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김상남 시의장의 강한 어조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한 의원도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일본처럼 이 상황이 다를 게 뭐 있냐”며 추후 가만있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한 의원은 “365일 난 여기서 꼼짝않고 있을란다”며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았고 어떤 의원은 건교부 장관이라도 만나 얘기해야겠다며 경비를 뿌리치며 몸부림도 쳐보는 모습이 목격됐다.
이들 의원들의 입장이 시민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향후 아산시민들의 감정이 어떤 경로로 얼마만큼 폭발할 지 미지수로 남겨두고 있다.
현명한 선택은 아직도 ‘진행중’
고속철도명과 관련해 천안과 아산이 그동안 접촉을 꺼려왔던 게 사실이다. 단 한번도 양 시가, 또는 단체나 개인들이 나서서 포럼이나 공청회, 대담 등을 가진 게 전무했다.
가장 민감한 사안임에도 뒷짐지고 눈치만 본 채 자신들의 입장만 고수하고 제3자가 편들어 주길 바라는 식의 방법에서는 이후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지 뻔했던 것.
그러나 요 며칠, 성무용 천안시장을 비롯한 천안측이 아산에 간접적으로 제의하는 등 짧게나마 현명한 절차를 밟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내용인 즉, 아산시의 영향력 있는 몇몇 인사에게 ‘아산에서 신천안역으로 동조해주는 대신 천안이 도청이전 등 신도시 관련 아산시 주장을 지지, 함께 관철시키는 방법’을 논의했다는 얘기.
시 관계자는 “이같은 시도는 주변만 빙빙 돌았을 뿐 핵심적으로 논의되지 못해 안타까웠다”고 전했다.
그동안 전문가 견해로는 당사자인 천안과 아산이 머리를 맞대고 해법찾기에 진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으나 아전인수격의 이기주의 속에서는 머리를 맞댄다는 자체가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부정적이었다. 특히 민감한 사안인 만큼 자칫 양 지자체간 큰 불상사도 초래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애초부터 역명이 한쪽으로 쏠려야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나있는 상황에서 두 지자체가, 그리고 시민들이 합리적 해법에 너무 소극적이었음이 이번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천안시의 모 관계자는 “심의만 끝난 터라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 이렇게 된 상황에 아산이 지명을 양보하면 천안은 도청 유치 등 갖가지 사안에서 아산과 공조해 밀어줄 의향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아직도 현명한 선택은 양 지자체에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