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은 1881년 1월29일 경남 동래에서 양반 관리의 자제로 태어났다. 부친의 유배로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학당에서 신학문을 교육받았고, 독립협회 활동과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해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189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우수한 성적으로 로녹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해 계몽운동을 벌였지만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김규식은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1913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동제사와 박달학원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펼치며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키워나갔고,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며 독립운동세력 통합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했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김규식은 1919년 초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됐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외무총장 자격으로 일제 침략과 식민지 통치의 실상,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렸다. 이후 열강에의 선전활동과 약소 피압박 국가간의 연합 등 다양한 독립외교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단결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끌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독립운동전선에 있지 않을 때에는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 후 임시정부 부주석이었던 김규식은 김구 등과 함께 귀국해 남북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중에 납북돼 그해 12월10일, 평북 만포진 부근에서 서거했다.
한편 김순애는 1889년 5월12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출생했다. 정신여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김순애는 민족계몽을 위해 교육활동을 펼치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오빠인 김필순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9년 1월 김필순과 막역했던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결혼한 후 신한청년당에 가입했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파견된 민족대표의 활동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봉기 촉구에 주력했다.
김순애는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국내외 애국부인회와 긴밀하게 연계하며 활동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와 함께 임시정부로의 독립운동자금 전달, 태극기 제작과 보급활동 등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파했다. 또한 독립전쟁을 대비해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해 많은 간호원을 양성하고 한국독립운동 선전활동을 펴는 데에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지속적인 임시정부 재정지원 활동과 함께 김순애는 한국독립당 산하 여성독립운동단체인 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통해 여성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등 항일여성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나아가 재중자유한인대회 참여 등을 통해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을 주장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이후, 김규식과 함께 귀국해 여성교육에 공헌했던 김순애는 1976년 5월17일 영면했다.
정부는 민족의 독립과 통합을 위해 헌신한 부부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김순애에게 독립장을, 1989년 김규식에게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