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수) 원내 제일 큰 어른, 김학주(60)씨 회갑연이 치러진 죽전원(중증장애요양원). 심홍식 원장은 “죽전원 생긴 이래 최초 회갑연”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김씨는 심 원장이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고향선배. 어려서는 ‘병신’ 취급하며 놀리던 아이들 틈에 심 원장이 끼어 있었다는 고백도 넌지시 한다.
자체 행사로만 하려던 것이 소리 소문없이 퍼져 몇몇 손님들이 찾아왔다. 한돌회를 비롯해 울타리봉사회, 대우 두정노인회 등이며 국악하는 이들도 찾아와 흥겨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김학주씨는 시간이 지나자 여유있는 웃음도 내보이며 60년을 장애인으로 살아온 ‘한’을 입바람에 실어 촛불을 꺼트렸다.
심 원장을 통해 들어본 김학주씨의 인생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어려서 뇌성마비에 간질을 앓던 김씨는 부모의 방치와 또래 아이들의 놀림를 받으며 괴팍한 성격을 갖고 자랐다. 다행히 종가집에 태어난 덕택에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란 그. 그럭저럭 50이 넘어서자 연로한 어머니와 큰형님에 기대는 것이 어려워지며 죽전원에 맡겨졌다.
“제가 죽전원을 소개했는데 6개월 후 제가 이곳 원장이 됐으니 요상한 인연이죠.”
96년 11월 죽전원에 와서도 김씨는 적응에 실패하며 쌈박질을 일삼았다. 비뚤어진 인생의 한이 싸움으로 표출된 것. 조그마한 트집거리가 있으면 바로 주먹부터 날렸다. “한번은 매번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그를 보며 직원 하나가 ‘왜이리 일찍 일어나냐’고 묻자 ‘뭔 간섭이냐’며 주먹 한방에 기절시킨 적도 있었죠.”
죽전원에 온 지 3년. 김씨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없자 원장은 그가 약간씩 농사일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영농일을 시켰단다. 웬 걸. 원내 2천평에 유기농법으로 재배하는 각종 채소들이 어느덧 그의 손을 거치며 먹음직스럽게 자랐고, 원우들 건강을 책임지기에 이르렀다.
“그의 적성이 이것이구나 깨달았어요. 그리고 잘한다는 칭찬도 곁들었죠. 칭찬은 누구에게나 듣기 좋지만 어려서부터 칭찬 한번 못 들은 김씨에게 큰 효과를 보였죠.”
이제는 제법 식구들에게도 호통치며 원내 제일 큰 어른으로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집안 가족들도 간질도 거의 없어지고 괴팍한 성격도 사그러진 그를 보며 안심하고 기뻐한다. “여기는 내 집이야. 죽을 때까지 죽전원에 있을 거야” 고백하는 김씨는 이제 죽전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터줏대감이 돼버렸다.
뇌성마비에서도 경증에 속하는 편마비의 그. 비록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지적수준이지만 죽전원에서만큼은 영농왕에 팔씨름왕, 거기다 창과 민요도 한 자락 하는 인기맨이다.
“김씨 아저씨도 한복 입고 저렇게 있으니까 멋있네.” 한 원우가 복도에서 유리 너머로 한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어린 식구들의 절을 받는 김씨의 흡족한 모습이 장내에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