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을 내민다. ‘원장 윤보순(48)’. 눈 비비고 다시 쳐다봐도 분명 윤보순이다. “지난 2월7일자로 바뀌었어요.”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모습과 선한 눈, 상냥한 목소리가 천상 윤경순 원장을 닮았다.
구룡동 사랑의 집(장애인 재활원) 윤경순 원장이 19년째로 접어들며 원장직을 동생에게 넘겼다. 이유는 자신의 건강과 시설운영에 지쳤다는 것. 그동안 직원 없이 40여명의 장애인을 돌보며 “장애인이라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땀흘려야 한다”는 소신을 가졌던 그. 매일 원우들과 들판에 나가 벼농사, 밭농사를 가르치며 개, 오리, 사슴, 토끼 등 가축을 기르며 억척같이 자급생활을 해왔다.
“이런 기억이 있어요. 85년 사랑의 집이 마련된 후, 제가 농사짓던 채소들이 자주 없어지곤 했는데 알고보면 형님이 뽑아간 것이었죠. 농사에 문외한인 형님이었는데 장애인들과 농사짓다 보니 어느덧 박사가 됐어요. 형님과 제가 이들 장애인들에게 농사를 가르쳤는데, 대단히 힘든 일이었죠.” 찰떡궁합이던 이들 형제간 우애는 시설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됐다.
“이젠 형님 몸이 많이 안 좋아요.” 형 걱정에 잠깐 주름살을 보인 윤보순 원장은 “1년 전쯤 저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내려와 도와달라’는 말씀이 있었죠. 몸이 나빠지자 시설 운영자를 세명 정도 염두했던 것 같은데. 고사한 분도 있고… 결국 원장직을 받고 보니 어깨가 천근같다”며 엄살.
하지만 19살에 ‘내가 동네일 보면 안 되겠냐’며 당당히(?) 반장도 맡았고 각종 특작물 등 선진 농업인으로 활발한 활동가였던 그다. 70년대 중반 당시에는 4H 풍세면 연합회장과 천안군 연합회 총무직을 맡으며 1년 중 2백일은 밖에서 살기도 했던 이력이 그에게 용기를 줬다. 지난 날 사랑의 집 가족과 함께 보내며 봉사했던 기억이 있기에, 또한 4H활동에 대한 보람이 늘 마음속에 남아있기 때문에 덜컥 원장직을 맡을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최근 식구가 부쩍 늘어 53명이나 되는데 형님과 나, 노목사님, 그리고 기사분 뿐이죠. 딱한 사정에 거절 못하고 받다 보니 이렇게 늘었어요. 전에 잠깐 있던 선생님처럼 성실한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쉽지 않네요.”
법인시설을 목표로 법인요건을 충족키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윤보순 원장에게 시급한 것은 미흡한 시설을 보완하는 것이다. 법인은 일단 합법적 운영시설인 데다 정부보조를 통해 직원인력과 예산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것은 가족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형의 건강과 53명의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근심이 눈가에 배어있는 윤보순 원장은 가슴 한켠에 ‘가장 아름다운 장애인 시설 만들기’라는 희망도 틔워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