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유해발굴에 앞서 아산시 김용한 자치행정국장이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잔을 올리고 있다.
어떤 이는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임을 당했다. 어떤 이는 죽임을 당한 이와 같은 마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다. 심지어 친인척은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일가족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 야만스런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침묵했다.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두려워 억울한 죽음조차 호소하지 못했다. 그렇게 학살당한 희생자들 유해 대부분은 이름 모를 산 속 어딘가에 버려진 채 방치돼 왔다.
1950년 6월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온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68년의 시간이 흘렀다. 당시 참상의 흔적이 아산시 배방읍 중리의 한 산골짜기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던 어르신들은 하나 둘 이 세상을 등지고 있다.
아산시는 22일 김장호 아산유족회장을 비롯한 유족 50여 명과 함께 개토제를 시작으로 한국전쟁민간인 희생자유해발굴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번 개토제에서는 홍성문화연대의 진혼무를 시작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본격적 발굴이 성사되기까지의 경과보고와 제례 순으로 진행됐다.
김광년 전국유족회장은 추도사에서 “지금도 전국 각지에 묻혀있는 민간인 희생자의 유해가 봉안 될 수 있도록 중앙정부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다”며 “유족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국유족회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한 국회차원의 입법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장호 아산유족회장은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히 희생자의 유해를 발굴해 봉안하게 돼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그동안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으로 고통 속에서 고향을 등지고 살았지만 이제라도 유족들에게 더욱 관심을 보내주신다면 고향을 위한 인생 3막을 시작하겠다”고 말하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어린이까지 일가족, 무참하게 학살
22일 오전 11시 30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부역혐의로 불법 살해된 아산지역 희생자에 대한 유해발굴이 시작됐다. 당시 아버지를 잃은 김광욱 유족회원(왼쪽)이 아버지 사진을 들고 흐느끼고 있다.
김광욱(73)씨.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당시 온양읍 방축리에 살던 김씨의 아버지(김갑봉, 당시 30세)는 인민군에게 부역한 혐의로 끌려갔다.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두 남동생이 모두 연행됐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김씨는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후에 김씨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자 어머니는 아버지는 물론 삼형제가 부역 혐의로 끌려가 금광 구덩이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살해됐다고 전했다.
22일 오전 11시30분, 김씨의 아버지 등 300여 명이 살해돼 암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금광구덩이(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86-1번지 일대) 앞에 김씨를 비롯해 1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아산시와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 유해발굴공동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공동조사단 공동대표, 아래 공동조사단)이 유해를 본격 발굴하기 위한 개토제를 하기 위해서다.
아산시와 공동조사단은 이날부터 한 달 일정으로 희생자 유해를 수습한다. 김장호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 아산유족회장은 "유해발굴 예산을 지원한 아산시와 관심을 두고 적극 나서준 공동조사단에 감사드린다"면서도 "유해가 발굴되지만, 가슴에 박힌 흉탄은 어디로 보내야 하냐"고 물었다. 이어 "총질을 한 경찰서로 보내야 하느냐, 아니면 정부로 보내야 하냐"고 덧붙었다.
그는 현장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드러내지는 않지만) 아산지역에 사는 유족들이 많다"며 "이들을 잘 보듬어 달라"고 호소했다.
김 회장 옆에서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김광욱 유족회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김 회장을 부둥켜안으며 한참을 흐느꼈다. 아버지를 잃고도 오히려 '빨갱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로 고향마저 등져야 했던 설움이 북받쳐 오른 듯했다. 그는 이날 가슴에 품고 온 아버지 사진을 내보이며 또 다시 눈물을 훔쳤다.
유해발굴아산지역대책위원회 장명진 대표는 "67년 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기 위해 내몰리던 착한 사람들이 참담하게 학살됐다"며 "유해를 발굴한다고 돌아가신 분들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끌어안고 위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곳을 시작으로 아산시 곳곳에 산재해 있는 나머지 유해들도 발굴되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아산시 김용한 자치행정국장은 “이번 유해발굴이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다하겠다”며 유해발굴 사업에 대한 행정적 지원을 약속했다.
28일까지 1차 발굴, 설화산 희생자 200~300명 추정
수습한 유골에서 탄피가 함께 나왔다. 공동조사단에 따르면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뼛속에 박힌 탄두를 흔히 볼 수 있어 당시 참상을 짐작케 한다고 전했다.
아산시와 공동조사단은 이날 개토제를 시작으로 오는 28일까지 1차 발굴을 벌일 예정이다. 이후 3월 말까지 2차 발굴을 벌인 후 5월까지 공식 보고서를 내놓을 예정이다.
이번에 수습 예정인 희생자 유해는 1951년 1월께 총살당한 대략 200~3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학살은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및 지시로 자행됐다. 또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동원됐다.
앞서 공동조사단은 지난해 11월 시굴조사를 통해 이곳에 다량의 희생자 유해가 묻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또 3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박선주 발굴단장은 "지난해 11월 시굴조사 당시 발굴한 3구의 유해에 대한 감식 결과 그중 한 명은 6~7세의 어린아이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등에 갓난이를 업고 양손에 어린아이 손을 잡은 일가족까지 몰살시켰다는 당시 목격자 증언을 뒷받침하는 결과다.
1951년 1월6일 경찰 배방지서는 향토방위대와 함께 183명을 창고에 가두고 전원 총살한 후 세일금광이 있던 뒷터 골로 중3리 청년들을 동원해 매장했다고 한다.
183명 창고에 가두고 무차별 총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아산지역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아산지역은 1950년 9월부터 1951년 1월에 걸쳐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혐의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민간인 800여 명이 적법한 절차 없이 희생됐다.
가해자는 온양경찰과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 태극동맹 등 우익청단단체며 희생자들은 어린아이와 여성 및 50대 이상 노년층도 포함됐다.
이번 시굴조사는 유족들과 아산시의 요청에 따라 배방면 수철리 산 181번지 설화산 일대 폐금광 자리에 국한했다. 진실과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1951년 1월6일 경찰 배방지서는 향토방위대와 함께 183명을 창고에 가두고 전원 총살한 후 세일금광이 있던 뒷터 골로 중3리 청년들을 동원해 매장했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주로 온양, 배방, 신창 등의 주민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