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과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가 이태준 선생을 2017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2월 한 달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서는 이태준 선생과 세브란스 의학원 2회 졸업생 사진 등 11점의 사료가 공개될 예정이다.
이태준 선생은 1883년 11월21일 경남 함안에서 출생했다. 1907년 10월1일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했고, 재학시절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를 만나 비밀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했다.
1911년 12월31일 김필순이 서울을 떠난 직후 이태준 또한 평양행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남경에 도착했지만 여비가 끊어지고 언어장벽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중국인 기독교도의 도움으로 겨우 기독회의원(基督會醫院) 의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1914년 김규식을 따라 몽골 고륜으로 이주했다.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업해 근대적인 의료기술로 몽골인들의 전염병을 근절시켰다. 몽골인들은 이태준을 신(神) 또는 부처와 같이 생각했고, 몽골 정부는 1등급의 국가훈장을 수여했다.
한편 이태준은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에게 2000원의 독립자금을 제공했다.
1921년에는 한인사회당 비밀당원으로 소비에트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지원한 자금 40만 루블의 금괴 중 8만 루블을 김립과 함께 상하이로 운송했다.
몽골 고륜으로 돌아오던 길에 북경에서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폭탄제조 기술자 마쟈르를 소개했다. 다시 몽골 고륜으로 돌아와 4만 루블의 금괴를 추가로 운송하던 중 러시아 백위파 군대에 피체돼 1921년 2월에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활동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
이태준 선생과 세브란스 의학원 2회 졸업생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