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사건 시해범의 행적을 쫓고 있는 일본인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8)씨.
지난 2일 오전 11시. 일본 구마모토현 교육회관 정문 앞에 작은 승용차가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이는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8)씨였다.
행사 시간까지는 아직 3시간 남짓 남았다. 그가 이날 행사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가늠이 됐다.
이날 오후 한국에서 온 명성황후 후손인 '홍릉봉향회'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 '명성황후 122주기 기념 한일 심포지엄'이 예정돼 있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준비해온 행사 물품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명성황후 초상화, 널판지,종이 상자... 등이 쉴 새 없이 나왔다. 그는 곧장 행사장인 회의실로 향했다. 이어 짐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어헤쳤다. 큰 종이상자에서는 손수 만든 연이 담겨 있다.
그는 "오늘 참석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두 달 동안 만들었다"며 "연은 일본과 한국을 잇는 우호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바람에 날리는 연(鳶)보다는 인연을 잇는 연(緣)이라는 의미가 크다는 설명이다.
2일 일본 구마모토 교육회관에서 열린 명성황후 122주기 한일 심포지엄에는 한국에서 간 홍릉봉향회원 15명을 비롯해 120여명의 일본 시민들이 참석했다.
두 달 동안 만든 연 참석자에게 "연은 일본과 한국 잇는 우호의 상징"
가이씨는 중학교 교사를 은퇴한 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시해범 48명 중 21명이 구마모토 출신임을 처음 알게 됐다. 이때부터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구마모토 지역 관련자의 행적을 쫓는 일에 집중해 왔다. 지난 2004년에는 지역 시민 100여 명을 모아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명성황후 시해자의 행적을 찾는 일이었다. 일본에는 한국과 같은 '족보'가 없다. 백여 년 전 가해자의 행적을 찾는 일은 순전히 발품을 팔아야 하는 고행길이었다. 한 명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약 700여 통의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고생 끝에 아소 국립공원 입구에 서 있는 마츠무라 다츠키(松村辰喜,1868∼1937)의 행적과 기념비를 찾아냈다. 기념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일을 '치적'으로 새겨 놓았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공모하고 사건 당일 직접 왕궁을 쳐들어간 구니토모 시게아키(1861-1909)의 외손자(가와노 다쓰미,河野龍巳)를 찾아낸 것도 그다. 그는 가와노씨를 설득해 경기도 남양주 홍릉을 찾아 명성황후 묘소에 무릎을 꿇게 했다. 함께 사죄의 절을 올렸다. 그는 지난 2005년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홍릉을 찾아 참회의 시간을 갖고 있다.
"다음 활동 목표는 '보다 깊은 역사 공부'"
그가 집중하고 있는 일은 지역 내 선대들이 한국에서 한 악행을 알리는 일이다. 도쿄는 물론 그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시해 사건을 알리고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그는 이후 활동 계획에 대해 "명성황후 시해범들은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감옥에 있는 내내 매일 진수성찬으로 식사를 했다"며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조사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건강을 염려하자 "살고 있는 아소산 근처에서부터 두 시간 넘게 직접 운전을 하고 왔다"며 "아직 끄떡없다"고 주먹을 쥔채 팔을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