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등 범 민족적인 독립운동의 불씨가 일어나 활활 타올랐다.
그해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2개월간 한반도에서 열린 집회·시위는 모두 1214회에 이른다. 시위 형태도 단순시위부터 물리적 충돌, 일본관헌 사상, 경찰·헌병 관서습격, 일반관서 습격 등 다양한 형태로 표출됐다.
방방곡곡 광범위하게 펼쳐진 시위는 경기 288회, 강원 74회, 충북 56회, 충남 75회, 전북 39회, 전남 44회, 경북 62회, 경남 121회, 황해 137회, 평남 85회, 평북 114회, 함남 75회, 함북 44회 등 모두 1214회가 기록으로 남았고, 2000회 이상으로 추정한다.
3·1절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다. 3·1운동 이후 학생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다.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로 고향 병천에 돌아와 부친 유중권 등 마을사람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리고 4월1일 병천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다. 이날 유관순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됐다. 수감생활 도중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28일 오전 8시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자비한 보복과 폭력을 가했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했던 미국선교사가 기록한 ‘The Korean Situation(한국의 상황)’ 문건에는 일본군에게 여학생들이 발가벗겨진 채 성고문과 학대를 당한 내용이 27쪽 분량으로 상세히 기록돼 있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을 성고문한 일본군이 전쟁터로 끌고 간 위안부 소녀들에게는 어떤 만행을 저질렀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2011년부터 정부에 등록했던 239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억울하게 떠나고, 이제 39명만이 남았다.
2015년 12월28일 한·일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기습 채택하고, 평화의 소녀상을 적대시하고 있다. ‘위안부 합의’를 무리하게 추진한 세력들은 3·1운동의 처절한 역사를 되짚어 보는 국민들을 더욱 분노케 하고 있다. 반성 없는 일본정부와 침묵으로 동조하는 한국정부를 향해 죽음을 앞둔 위안부 할머니들은 아직도 3·1운동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