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동학농민혁명 제122주년 되는 해다. 11월4일 오후 2시 아산시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희생당한 농민군에 대한 첫 위령제가 열렸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제122주년 되는 해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반외세 투쟁으로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봉건왕조에 맞서 빈부격차와 신분제 등으로 신음하던 백성들이 ‘만민평등(萬民平等)’의 기치와 ‘나라를 바로 잡고 백성을 살리자’는 보국안민(輔國安民) 정신으로 떨쳐 일어났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되면서 모든 국가 시스템에 비공식 라인의 인물들이 개입해 각종 부정과 이권개입 정황이 드러나면서 온 국민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렸다. 이 시점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지난 4일(금) 오후 2시 아산시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희생당한 농민군에 대한 첫 위령제가 열렸다.
옛 온양군 관아인 온주아문에서 열린 이날 위령제 행사에는 (사)동학농민혁명아산시기념사업회 정해곤 이사장을 비롯해 예산아산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 아산시민운동가, 시민사회단체대표, 김영범 아산부시장, 아산시의원 등이 참석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나선 혁명사
한국 근대민족운동사에서 1894년에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운동은 피지배층인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정치세력화 하는데 전기가 됐을 뿐 아니라 한반도 주변 동북아시아의 국제적 역학관계에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됐다.
그동안 시대나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동학난’ ‘동학혁명’ ‘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 등으로 불리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사회민주화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재조명됐다. 그 성과로 2004년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일반화됐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는 정의에서 ‘1894년 3월에 봉건체제의 개혁을 위해 1차 봉기했다.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2차 봉기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사)동학농민혁명아산시기념사업회 정해곤 이사장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전국민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린 가운데,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고 말했다.
농민 수탈과 삼정문란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 3대 60년에 걸쳐 나이어린 왕들이 즉위하자 안동 김씨, 풍양 조씨로 이어지는 세도정치가 이어지면서 중앙정치의 기강 문란을 가져왔다.
중앙정치의 문란은 탐관오리의 득세를 가져왔으며, 사회는 동요되고 삼정(전정·군정·환곡) 문란을 초래했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산 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되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했고, 이로 인한 민중의 불만이 더욱 커지면서 봉건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주인의식이 싹텄다.
19세기 말은 삼정이 극히 문란한 가운데 지주제와 상품경제가 발달했다. 탐관오리의 수탈뿐 아니라 토지가 지주에게 집중되고 농민층의 분해 과정이 급속히 진행됐다. 홍수나 가뭄 등 자연재해가 지속되고 전염병도 주기적으로 창궐했다.
19세기 말 조선왕조의 재정은 사회 전반의 화폐경제화로 현물재정이라는 봉건적 재정원칙이 흔들리고, 고종 3년경부터 시작된 경복궁의 중건, 두 차례의 양요로 인한 군사지출이 막대해 재정적자가 심하자 민중에 대한 수탈 강화로 이어졌다.
아산지역 지리와 역사
고종 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현재의 아산시로 통합되기 이전의 온양군과 아산현 신창현 등 세 고을의 군세로서 가구수와 인구수에 대한 통계가 나와 있다.
온양군은 2813호에 1만5620명(남 6734명, 여 8886명), 아산현은 4013호에 1만7405명(남 6777명, 여 1만628명), 신창현은 1814호에 7750명(남 2653명 여 5097명)으로 당시 아산시 지역 전체는 8640호 4만775명으로 나타났다.
당시 호구조사에서 천민이나 노비, 머슴 등은 누락됐기 때문에 1894년 당시 아산지역의 실제 인구는 이 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되지만 당시 가구수와 인구수의 개략을 짐작할 수 있다.
온양군은 대략 지금의 구온양과 초사. 용화. 방축. 실옥. 풍기동, 배방과 탕정면 일대로 관아는 현재의 온주아문 자리다. 아산현은 염치. 음봉. 영인. 인주. 둔포면 일대며 관아는 영인초 여민루 자리다. 신창현은 점량, 득산, 배미동과 신창, 도고, 선장면 일대며 관아는 지금의 신창초 자리다. 당시 온양군수는 종4품, 아산현감과 신창현감은 종6품이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아산군으로 통합됐다.
아산지역은 백석포에 청군이 진주한 음력 5월 초 이후, 일본군이 청군을 패퇴시킨 6월 말까지 청군과 일본군에 의해 직접적인 고통을 겪었다.
아산지역 동학의 전래와 확산
1893년 무렵 탐관오리들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산사람 김상준에게 누명을 씌워 수 만 냥을 책임지워 목숨을 끊게 만들었으며, 온궁의 수리비를 몇 배나 부풀려 착복하고, 백성의 토지와 보를 함부로 빼앗았다. 특히 동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관련 누명을 씌워 착복했다.
이익제는 그 아들과 이웃 여자가 간통했다고 꾸며 이웃 여자를 죽게 하고, 빼앗은 뇌물이 1만 냥이며, 백성의 토지와 보(洑)를 함부로 빼앗아 자기 소유로 했다. 또 개인의 빚을 일가에게 징수하고, 화를 인척에게 연좌시켰다. 도내 공사전(公私錢)을 훔치고 빼앗은 당백전이 64만4391냥이고, 엽전은 10만8390냥이다.
각 읍의 진휼을 보충하기 위한 돈 6만1600냥은 진휼에 사용하지 않고, 온궁 수리비라고 한 4만냥, 산성을 수축하는 비용 2만냥을 갈취했는데, 실제 온궁 수리비는 8000냥에 불과했고, 산성의 공사는 이미 각종 명목으로 함부로 징수해 기록된 돈은 거짓이었다.
아산은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충남 내포지역(서부지역)의 일원으로써 예산, 당진, 홍성, 서산, 태안 지역과 함께 움직였다. 이는 동학의 유입, 세력화도 비슷하다. 아산지역에 동학이 전래된 시기는 1870년대 말로 추정된다.
“동학 혁명정신, 오늘 날 더욱 절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오늘날 더욱 절실합니다” (사)동학농민혁명아산시기념사업회 정해곤 이사장의 말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120여 개 군현에서 봉기하고 전투를 치렀다. 그 기간은 1년 가까이 지속됐다. 동학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비롯한 지배층의 군사력을 압도했지만, 청국에 원병요청을 했다가 일본에 장악된 조선 친일내각과 일본군에 의해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특히 아산지역은 백석포에 청군이 진주한 음력 5월 초 이후, 일본군이 청군을 패퇴시킨 6월 말까지 청군과 일본군에 의해 직접적인 고통을 겪었다. 그만큼 반외세, 척왜(斥倭)의 분위기가 어느 곳 보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군이 9월 초부터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2차 기포를 시작했을 때, 아산지역 백성들도 함께 봉기했다. 음력 10월5일 아산현을 혁파해 무기를 확보한 후, 신창 지루동에 둔치했다가 곧바로 내포동학농민군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당진 승전목 전투, 예산 관작리 전투를 승리했으나 홍주성 전투에서 관군과 우수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에 패배한 후, 가혹한 탄압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비슷한 시기에 전봉준, 손병희가 이끈 주력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를 넘지 못했다.
정해곤 이사장은 “비록 동학농민혁명은 처절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 일제에 대항한 3.1운동과 반일투쟁으로 이어졌으며, 그 정신은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이어 “오늘날 한반도는 121년 전 동학농민혁명 당시와 비슷하게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은 남북분단으로 70년 이상 대결과 갈등을 지속하고 있다”며 “만민평등, 보국안민, 반외세의 동학농민혁명 정신이야말로 현재에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사)동학농민혁명아산시기념사업회는 “122년 만에 아산지역동학농민군의 위령제를 모시는 것은, 단지 과거 선조들을 기억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그 정신을 올곧게 계승 발전시켜 지역사회 공동체 발전을 위한 초석을 놓기 위함”이라며 “특히 요즘 우리의 정치현실이나 대외적 상황은 동학농민혁명정신을 더욱 필요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