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독립운동가 나운규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과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가 나운규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10월 한 달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서는 나운규 선생의 사진 등 10점의 사료가 공개될 예정이다.
나운규 선생은 1902년 10월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간도의 명동중학(明東中學)에서 수학했다. 1919년 회령에서 3·1운동에 참여했고, 연해주로 건너가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목숨을 건 용병 생활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북간도로 돌아왔다.
북간도로 돌아온 후 은사였던 박용운(朴龍雲)을 따라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했다. 도판부는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결사대였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청산리로 이동하던 선생은, 공부를 통해서 더 큰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충고를 듣고 독립군 부대를 나와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온 나운규 선생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제가 도판부 관련 비밀문서를 획득하면서 박용운 등과 함께 피체됐다. 재판에 회부된 나운규 선생은 보안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3년 3월 출소한 나운규 선생은 예림회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하면서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됐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총희의 연’에서 가마꾼으로 데뷔하고 심청전, 장한몽, 농중조 등의 영화에 연거푸 출연하면서 특색 있는 배우로 주목받게 됐다.
나운규 선생은 1926년 10월1일 ‘아리랑’을 제작했다. 6·10만세운동의 열기를 스크린으로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는 평가를 받은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됐다. ‘아리랑’ 이후 제작한 풍운아, 금붕어 등이 흥행하면서 나운규 선생은 조선영화계의 스타가 됐다.
1930년부터 음성영화인 ‘토오키(talkie)’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면서 조선영화의 제작은 극도로 위축됐다. 1935년 선생은 ‘아리랑’을 토오키 영화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녹음 실패와 재녹음 과정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고, 폐병을 얻어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나운규 선생은 원산만프로덕션의 지원을 받아 1937년 토오키 영화 ‘오몽녀’를 제작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활동한 결과 폐병이 악화돼, 1937년 8월9일 3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활동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