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두만강 전경을 찍은 사진.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문창학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5월 한 달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서는 일제강점기 두만강 등 관련자료 9점이 공개될 예정이다.
문창학 선생은 함경북도 온성군 출신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했고, 1920년 12월 러시아에서 조직된 임시대한독립군에 가입했다.
1922년 동료대원 14명과 국경을 넘어 일본 해군기지인 함경북도 웅기항(雄基港)을 공격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국경 경비가 강화돼 인근의 신건원주재소로 목표를 변경했다. 문창학은 1월5일 밤12시40분 경 신건원주재소에 도착해 불빛으로 주재소의 위치를 대원들에게 알렸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대원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해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고, 주재소의 숙소를 파괴했다. 일본 군경이 반격해오자 폭탄 2개를 투척하고 퇴각했다.
문창학을 비롯한 대원들은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 혼춘(琿春)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일본 군경에 대한 공격과 밀정 처단을 계속하던 중 1922년 12월 동료 대원 13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혀, 함경북도 청진부 청진형무소로 압송됐다.
1923년 5월25일 대원 14명에게 각각 사형, 무기징역, 10년 징역형 등 중형이 선고됐다. 사형선고를 받은 문창학과 김학섭은 고등법원에 상고했다. 재판은 9월부터 약 두 달 동안 경성복심법원에서 계속됐지만, 결과는 끝내 바뀌지 않았다. 문창학은 다시 사형을 선고받고, 1923년 12월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문창학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란 노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만든 이시우가 중국 도문(圖們)의 한 여관에 머물 때였다. 그가 여관방에서 빼앗긴 조국의 아픔을 노래하는 악보로 고민하고 있던 중 우연히 한 여인의 애절한 통곡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소리는 문창학의 아내 김증손녀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편에게 술 한 잔을 올리다가 낸 울음소리였다. 그날은 바로 죽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이튿날 이시우의 눈에는 말없이 흐르는 두만강의 푸른 물결이 나라를 잃고 헤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피눈물처럼 보였다고 한다.
<정리/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