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16일 오전 8시52분32초.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 긴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첫마디는 “살려주세요” 였다. 배가 침몰하고 있음을 알린 것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시 세월호에 타고 있던 단원고 학생이었다.
구조요청을 받은 전남소방본부는 목포해경을 연결했다. 그런데 목표 해경은 최초 신고자에게 경도와 위도를 말하라며, 배의 위치를 물었다. 당황한 학생이 ‘네?’를 연발했고, 해경은 반복해서 GPS를 거론하는 등 위치를 물었다. 그로부터 1분30초 뒤 해경 측은 선박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고, 신고학생은 ‘세월호’라고 답했다.
세월호는 최초 신고보다 3분 후, 사고 해역과 가까운 진도관제센터가 아닌 제주관제센터에 교신해 배가 침몰 중임을 알렸다. 제주관제센터는 목포해경이 아닌 제주해경에 연락했고, 8시58분 목포해경이 사고를 접수했다. 이 사고접수도 세월호 승무원이 아닌 학생의 신고로 이뤄졌다. 추후 상황을 파악한 진도관제센터가 9시6분에 세월호와 교신해 세월호를 호출해 직접관제를 시작했다. 9시17분 진도관제센터와 교신에서 세월호 선원은 배가 50도 이상 기울어져 있다고 보고했다.
사고 접수 후, 해양경찰은 출동 및 구조에 나섰다. 해경은 헬기 1대와 경비정 20척을 현장에 투입해 헬기로 승객 6명을 구조했고, 100여 명은 경비정에 옮겨 태워 인근 진도와 목포 등으로 이송했다. 당시 세월호 참사 상황을 돌아보면 민간어선의 활약이 매우 두드러졌다. 어민들은 빠르게 응답했고 민첩하게 반응했다. 민간 어선 박영섭(56) 선장은 16일 새벽 조업을 마치고 세월호가 침몰 중이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바로 뱃머리를 돌려 사고 현장에 도착해 구조작업에 참여해 승객 27명을 구조했다.
조도면 청년회원 김형오씨(47)는 1.1톤급 소형어선으로 구조작업에 동참해 25명을 구조했다. 그 외에도 메시지를 받고 출항준비를 마친 조도면 어선은 60여 척이었다. 이들 어민 150여 명은 불과 20분만에 사고현장에 도착해 구조를 도왔다.
사고당일 구조한 세월호 탑승자는 승무원 23명, 단원고생 75명, 교사 3명, 일반인 71명 등 모두 172명이었다. 2014년 4월18일, 세월호는 완전히 침몰했다. 이 사고로 탑승인원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됐다. 우리의 기억은 거기서 멈췄다.
사고가 왜 발생 했고, 왜 구조하지 못했고, 누구 책임인지 알지 못한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반드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