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당시 기사
일제 강점기 시절, 아산에도 독립운동이 있었다.
현재까지는 아산군지와 구전을 통해서만 확인돼 왔다. 그러나 최근 당시 일제 총독부에 의해 수감되거나 벌형을 받았던 명단이 나와 당시의 아산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들과 당시 정황이 드러났다.
3?1운동과 관련한 논문을 쓴 김진호씨는 1900년대 아산시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정리한 논문을 내놔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아산지역의 독립운동은 3월11일 처음 발생해 4월4일에 마쳤으며, 아산시에서만 1백93명이 처벌을 받은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아산지역의 3·1운동은 2차에 걸쳐 집중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는데 제1차는 3월11일부터 온양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제2차 독립만세운동은 4월1일을 전후해 됐고 15일간에 걸쳐 계속되다, 일제의 무력적 탄압과 병력으로 인해 중단됐다고 설명했다.
아산의 독립운동
아산 독립운동은 3월11일에 발생했다.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학교 운동장에서 독립만세가 있었다. 그러나 학교장의 훈화로 해산됐다. 이튿날 온양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계획했으나 일제는 이를 알아채고 학교 부근에 임시 헌병 파출소를 설치하여 수명의 학생을 구타했다. 또한 당일인 12일에 학생과 시장 군중들의 독립만세를 진압하고 5명을 체포했다.
이어 14일 현창규가 주도한 독립만세 때는 22명이 체포됐고, 15일 독립만세때도 9명이 피검 됐다. 충남도장관(구와하라(桑原))의 요청에 따라 평안도의 철도보호대에서 온양으로 하사 이하 병졸이 파견되고 아산으로는 장교 이하 10명이 이동했다. 온양에서만 3회에 걸친 독립만세운동에 있었으며 헌병들의 학생 구타와 40명에 가까운 인사들이 체포됐다.
격렬한 독립만세 전개
아산지역의 3?1운동은 3월 말과 4월 초에 격렬히 전개됐다.
1차 독립만세운동이 온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2차 독립만세운동은 온양을 포함한 아산지역의 각 면인 탕정, 염치, 배방, 송악, 둔포, 신창, 영인, 인주, 선장 등 10개 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했다.
충남지방에서 3?1운동은 3월27일부터 지역이나 독립만세운동의 횟수가 점차 증가하면서 3월31일에 급격한 확산돼 4월4일에 최고조를 이뤘다. 8일까지 활발히 전개되다가 9일부터는 급속히 약화됐다.
아산지역도 마찬가지로 충남지방의 활동을 같이해 3월31일과 4월1일에 군내 탕정, 염치, 배방, 송악, 온양, 둔포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됐다.
일제 무력적 대응
독립만세운동의 일반적 전개 형태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었다.
독립만세를 부르는 과정에서 선언서와 같은 유인물을 배포하거나 태극기를 흔들어 독립만세의 기세를 북돋아 분위기를 고조시켜 만세 군중을 유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같은 평화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는 군중에게 일제의 무력적 대응은 만세 군중들을 자극해 무력적 충돌이 발생했다. 또한 일제의 대응이 있지 않아도 만세 군중들이 주도자들의 유도로 일제에 대한 인적, 물적 가해를 가하는 독립운동이 자주 발생했다.
4월1일 둔포면 운용리 마을 주민들이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하고 당시 일본인 소유 공관 20여개소를 파괴했다. 2일에는 신창의 읍내리 주민 2백여명이 학성산에 횃불만세를 부르고 이덕균과 박태화의 주도로 만세군중들은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및 보통학교로 이동하면서 문과 유리창을 부쉈다. 4일에는 선장의 2백여명의 면민들이 군덕리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오후 3시경 정수길 김천봉 등의 주도로 곤봉을 휘두르며 헌병 주재소를 진입해 투석 등으로 주재소와 창문을 파괴했다.
횃불만세운동은 탕정, 염치, 배방, 송악, 온양, 둔포, 신창, 영인, 인주, 선장의 면내에 전개됐다. 횃불만세운동이 대부분 산에 올라 정상 부분에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지만 영인의 백석포, 인주의 공세리와 걸매리 및 둔포 등의 해안지역에서도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3월31일에는 탕정, 염치, 배방, 송악의 4개 면내 50여 개소에서 횃불만세운동이 있었다.
이 횃불만세운동은 이튿날인 4월1일로 이어져 탕정, 염치, 배방 이외 온양과 둔포에서도 진행됐다.
일제의 탄압
이 같은 독립운동 탓에 일제의 탄압도 적지 않았다.
5개 면의 수형자 명부에서 3?1운동 관련 수형자는 온양면의 18명, 송악면의 41명, 염치면의 2명, 영인면의 17명, 선장면의 1백15명, 합계 1백93명이다.
송악의 경우 3월31일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했을 뿐인데 41명이라는 많은 인사들이 태형에 처해졌다. 35명이 태형 60도, 6명이 90도의 처벌을 받았다. 41명 인사의 마을별 분포는 관평리 16명, 동화리 13명, 거산리 8명, 역촌리와 송학리 각각 2명으로 5개 리에 걸쳐 있다.
선장면의 경우 4월4일 선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인원이 2백여명이며, 수형자 명부의 기록에는 1백9명이 태형 40∼60도의 처벌을 받았다.
김진호 논문 발표자는 “수형 인사들이 수적인 차이는 있지만 면내 각리에 고루 분포해 있는 것으로 봐 이 선장의 독립만세운동은 거의 모든 면민이 참여한 독립만세운동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또한 한개 면의 독립만세운동 수형자들로서는 상당히 많은 인사들이 일제탄압을 받았다. 이는 일제의 탄압이 그 만큼 가혹하였음을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밝혔다.
여러 계층 참여
아산지역 3?1운동은 여러 계층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만세운동의 서곡은 학생들에 의해 3월11일 온양 공립보통학교에서 울렸고, 이튿날인 12일과 14일에도 온양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전개했다. 학생들이 아산지역 3?1운동을 시작하고 초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에 불을 지폈다.
종교계의 독립만세운동으로 천도교의 권병덕의 지시를 받아 3월14일 온양 시장에서 현창규 등이 중심이 되고,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가 다수 참여해 전개한 만세운동과 4월 2∼3일 영인에서 횃불만세운동은 기독교가 중심이 돼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당시 유림들은 직업 분류에서 구분되지 않은 것은 대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농민들 가운데 일부는 유학자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일제가 수형자 명부를 작성할 때 ‘族徵’(족보)에 양반, 상민, 백정 등을 기재한 사례가 있는데, 여기서 양반은 유학자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여성이 주도한 독립운동
아산지역 3·1운동은 여성주도 하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었다고 김진호씨는 설명했다.
4월1일에 유관순 열사가 활동한 천안 병천의 3?1운동은 여성이 주도적으로 전개한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이었다면 아산에서는 3월31일 염치 백암리에서 영신학교 여교사인 한연순(韓連順 22)과 이화학당 학생인 김복희(金福熙 17)가 주도했다고 새롭게 밝혀졌다. 이들은 마을의 북쪽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횃불만세운동으로 한연순은 징역 3월, 김복희은 징역 2월을 선고받았다. 여성들의 이와 같은 참여는 민족사의 한 영역을 차지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청·장년층 참여
아산지역의 3?1운동은 20대와 3?40대의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인사들 2백명의 연령별 분포는 10대가 10명, 20대가 82명, 30대가 62명, 40대가 36명, 50대가 3명, 60대가 2명이고 5명은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20대가 가장 많이 참여하고 그 다음으로 30대, 40대 순이며, 2?3?40대가 1백80명으로 확인돼 1백95명에 92.31%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지역간에 연령상 분포의 차이는 있지만 30대를 전후 인사들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추진됐다고 밝혔다.
김진호씨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아산지역 3?1운동은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 폐해 및 일제의 식민지 지배 하에 항일 활동 등으로 형성된 항일 의식은 3?1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