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독립운동가 문창범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문창범(文昌範·1870~1938) 선생을 2015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12월 한 달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서는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서 등 관련자료 12점이 공개될 예정이다.
문창범 선생은 1870년 함경북도 경원군 유덕면 죽기동에서 태어나 8살 때인 1877년에 우수리스크 인근의 쁘질로프카(한국명 육성촌) 마을로 이주했다. 러시아 군대의 납품업자로 일하며 재산을 모은 선생은 연해주 지역의 한인학교 설립과 ‘해조신문’ 등 한글신문 발간을 지원했다.
경술국치 후 1911년 권업회(勸業會)가 결성되자 선생은 우수리스크 지회 의원 겸 교육부장으로 활동했다. 러시아 혁명 발발 후 러시아 한인사회 결집을 목적으로 설립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 제2차 총회에서는 회장으로 선출됐다. ‘대한독립선언서’에 만주․러시아 지역 한인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선생은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하고자 1919년 2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해 결성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서 의장으로 선출됐다.
또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3월17일 오전, 니콜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오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2만여 명의 동포가 참여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개최했다.
3·1운동 후 여러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대한국민의회 해산결의를 선언한 뒤, 임시정부 통합운동에 동참해 임시정부의 초대 교통총장(交通總長)으로 임명됐다. 선생은 취임을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대한국민의회를 재건해 활동했다.
선생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이후 구체적인 행적과 사망 등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