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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명장! 이발의 달인 박홍배

이용업 입문 43년만에 ‘대한민국 명장’의 반열에

등록일 2015년10월06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박홍배 명장(56·천안 쌍용동 하이렉스파내 이발실)

“저를 포함해 형제 중에도 이용업에 종사하는 동생이 있고 제 둘째 딸도 미용업을 하고 있으니 ‘이·미용 집안’이라 해도 괜찮겠네요.. 얼마 전 ‘명장’에 오른 다음 업소건물, 고향마을, 인력공단 등에 현수막도 걸리고 축하도 많이 받았죠. 잔치까지는 아니어도 축하 저녁식사 자리도 가졌고요(웃음).”

박홍배씨는 2015년 9월1일, ‘대한민국 명장’의 반열에 오른 프로 이발사다.

‘대한민국 명장’은 ‘숙련 기술 장려법’ 제11조 규정에 의거, 산업 현장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로 숙련기술 발전 및 숙련기술의 지위 향상에 크게 공헌한 사람을 선정, 우대하기 위해 제정된 제도다.

서비스업종의 명장은 2000년부터 도입됐는데 현재 우리나라에 이용업 관련 명장은 단 10명이다. 대한민국에 있는 이발사를 대략 2만명으로 어림잡으면 상위 0.05%에 해당하는 수치. 이들 중에서도 직접 가위를 들고 현직 이발사로 활동중인 사람은 사실상 4명 정도에 불과하다.


가족 생업 위해 16살 이용업에 뛰어들어

박흥배 명장은 이용업에 종사한지 43년 만에, 기술자로서 가장 영예로운 이름인 ‘명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원래 고향은 예산 봉산인데 70년대 초에 온 가족이 천안 직산으로 이사를 왔어요. 가난한 소작농의 6남매중 둘째로 태어난 저는 집안 형편이 어렵다보니 일찍 일을 해야 했죠. 삽교에 살던 숙부님의 권유로 16살 때 삽교의 한 이발소에 처음 들어가게 됐는데 그게 시작이었답니다.”

당시 어느 업종이나 그랬겠지만 이발소에서도 가위를 잡기 위해선 최소 3, 4년의 세월은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천안 직산의 한 이발소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중기술자로 일하다가 77년 1월이 되어서야 겨우 본인의 가게를 열 수 있었다.

손기술이 좋은데다 열심히 일하다보니 일한만큼 돈을 벌수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박홍배 명장은 천안에서 서울의 호텔로 출퇴근할 만큼 기술을 인정받는 몸이 됐다. 나중에는 버들육거리 인근에서 사업을 했고 84년에는 성거로 옮겨 일을 이어갔다. 97년에는 북일고 앞에서 가게를 열고 5년여를 운영했고 2002년 경부터는 쌍용동에 위치한 스파 안에서 이용원을 경영하고 있다.

그동안 복지부장관상과 법무부장관 표장을 받았고, 국제기능경기대회에 참가해 입상한 국가대표 2명을 키워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박 명장에게서 배운 친동생은 입상 이후, 청와대에 고용돼 김대중 대통령의 이발을 담당했고 현재도 서울 여의도에서 성업 중이라고 한다.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개발 이어져야 '명장'

박홍배 명장 또한 스스로 노력하기를 게을리 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 명장’이 되기 위한 조건은 까다롭기 그지없다. 아무리 남들보다 뛰어나도 실전경험과 연구가 이어지지 않으면 오르지 못하는 자리인 것. 특허·실용신안, 서적·논문 발행이나 매체기고, 전시회·세미나 참여, 기술개발건수, 매뉴얼개발, 사회봉사활동 등 다양한 분야의 모든 활동이 필요하고, 그렇게 수치화 된 실적이 모두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오랜 세월 한 일에 종사하다보니 재밌는 에피소드들도 많다.

“손님 중에 대학 교수님이 한 분 계신대 완전한 백발이세요. 그런데 제가 개발한 반백 염색을 하고 집에 가셨더랬지. 그런데 아내 분께서 ‘머리가 너무 멋있다’며 본인도 이렇게 염색하고 싶다고 어딘지 꼭 알려달라고 보챘다나봐. 그랬더니 그 교수님이 ‘이 양반아 당신은 알아도 못 가. 사우나 남탕에서 한 건데 그래도 가볼랴?’이러셨다네요.(웃음)”

이발이 워낙 개인적인 성향이 반영되는 일이어서 단골 중에 멀게는 서울에서 오시는 손님도 있다.
“천안에서 단골이셨던 분인데 서울로 이사를 가셨어요. 이후에도 머리를 다듬으려 이발소도 가보고 미용실도 찾아가고 했는데 아무리해도 만족을 못하시겠더랍니다. 지금도 서울에서 여기로 이발을 하러 오세요.”


다시 한 번 이발업의 전성기가 오길…

하루에 박홍배 명장의 업소를 찾는 손님은 보통 20명. 바쁠 때가 30명 정도로 다른 사업장에 비해서 조금은 나은 편이다. 하지만 스스로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명장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이용업의 모든 성쇠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 온 명장이 보는 이용업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동안 미용에 치이고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은 줄어들고 하다 보니 악순환의 연속이었지. 언제부턴가 이발소는 완전히 나이 먹은 남자들만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잖아요. 이제 이발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을 발굴하고 가르쳐서 이 명맥을 잇게 하고 싶어요. 다문화가족이나 북한이탈주민 등 하고 싶어하는 사람 누구라도요. 미용업도 이젠 거의 포화상태잖아요? 젊은 남자 분들도 이발소에 한 번 와보면 분명 생각이 달라질꺼에요. 면도에서 세심한 수작업까지 완전 스타일이 다르거든!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중흥기가 찾아오지 않을까요?(웃음)”
 

 

 

이진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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