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의 삼한통일 성업을 도와 사직을 지킨 공신 사산(蛇山)사람 최양유(崔良儒)에게 직산(稷山)지명이 내려졌다. 직산 최씨의 시조이다. 천안부(天安府)와 직산 그리고 성거산(聖居山) 지명은 고려 태조 왕건의 정신이 담겨진 지명이 됐다.
천안은 고려 태조 왕건과 인연이 깊다. 천안 부원 부인을 11번째 왕비로 맞아 아들 둘을 뒀다. 한림대 김용선 교수는 논문 <한국중세사연구 41호>에서 고려 재상을 지낸 직산현 출신 최홍재(崔弘宰) 묘지명을 소개한 내용에서 고려 태조때 사산(蛇山) 호족 공신 최양유가 밝혀졌다.
최양유 공신은 최홍재(崔弘宰) 재상의 고조할아버지이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전쟁을 치르면서 여러 지방 호족들과 복속 또는 갈등 관계를 맺었다. 후백제와 국경을 이뤘던 현재의 충청도는 더욱 그러했다. 청주는 고려에 예속되었지만 호족들이 수시로 반란을 일으켜 못믿을 땅이었다. 청주와 가까운 목천도 비슷했다. 반면 천안인근으로 고려에 귀속된 온양과 사산(직산)은 토착호족이 밝혀지지 못했다. 그런데 사산(직산)에 큰 호족 직산 최씨(稷山 崔氏)를 밝혀낸 자료가 나온 것이다.
최홍재는 고려 상장군 최적(崔廸)의 아들로 고려때 무인으로 여진족을 정벌한 공을 세우고 재상까지 된 인물이다. 무덤은 파주와 가까운 북한 장단에 있는데 묘지명을 새긴 지석의 탁본이 공개되어 밝혀졌다. 묘지명에 주인공 최홍재를 소개하는 첫머리에 고조할아버지 최양유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삼한공신(三韓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최양유(崔良儒)는 직산현 사람인데 처음 태조가 통합할때(統合時) 양유가 같이 한마음으로 도와 공을 이뤘다(轉佑成功). 태조가 순행하여 이 현의 북악(北岳)에 이르러 양유가 사직을 지켰다고 하여(社稷之衛) 이름을 직산이라고 하였다(因名稷山).>
최양유는 왕건의 통일전쟁을 도와 공신이 됐고 최고품계까지 올랐다. 사직을 지켰다고 하니 고려의 운명과 관련돼 큰 역할을 한 듯하다. 사직은 국가가 제사 지내는 토지신(社)과 곡식신(稷)으로 통상 국가를 뜻한다. 최양유는 후삼국시대 직산의 대표적 호족이었던 것이다. 공주·홍성·청주·진천 등에서는 호족 존재가 확인됐지만 천안은 이름이 알려질 만한 호족이 밝혀지지 않았다.
또 놀라눈 건 직산 고을명 유래가 명확해졌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직산 이름을 사직과 연결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 직(稷)이 곡식인 피를 뜻해 그쪽으로만 연관지었다. 태조는 940년 전국적인 고을명 개편 때 직접 직산에 행차해 최양유를 극찬하고 고을 이름에도 칭찬의 뜻을 담았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직산이 천안부의 속현으로 원래는 백제온조왕의 도읍지 위례(慰禮)였다가 고구려 때에는 사산현이라고 불렀고 신라때는 백성군(白城郡)의 영현 사산현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 직산으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사직(社稷)을 지킨 최양유의 공로로 말미암아 태조가 사산지역의 이름을 稷山(직산)이라고 고쳐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최양유 기록은 이 묘지명 외에 찾을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통일에 기여한 삼한공신(三韓功臣)은 3000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삼중대광(三重大匡)까지 오른 이는 많지 않다. 고려 통일 후 200년이 흐른 시점에 후손의 묘지명에 등장한 최양유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해 사직(社稷)을 지켰다는 칭찬을 들었을까. 936년 9월 후백제 공격을 앞두고 천안부(天安府)의 병력 및 군량 확보에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직산최씨의 조선시대 과시별(科試別) 합격자를 밝혀본다.
文科1명 武科 5명 生員進士는 없고 조상의 공덕으로 얻은 벼슬 음관(蔭官) 1명 잡과(雜科)인 天文學 地理學 명과학(命課學) 종사 음양과(陰陽科)는 38명 의관(醫官)은 12명 外國語 역과(譯科)26명 형률(刑律) 종사 율과(律科)는 7명으로 모두 90명 인데 天安ㆍ木川ㆍ稷山지역에서 단연 최다수 과시합격자를 배출한 가문(家門)이다. 현재 직산 최씨가(崔氏家)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전국에 800명 성환·직산에 두집만이 있고 함북 온성군 영화면 상화동에 37호수 기록이 있다.
천안사학회 조한필(박사과정) 회원이 관계자료 논문을 입수하고 정리해서 발표했다. 직산에 백제 건국시조 온조왕 사당 재현에 이어 직산 지명사유을 밝혀낸 김에 천안을 지명한 태조왕건왕의 묘당(廟堂)과 회고정(懷古亭)을 복원하는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