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주면 조창지
(공세리 소재, 기념물 제21호)
인주면 공세리 마을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도로변 우측에 조창지가 있다. 조창은 말 그대로 조세미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창고를 말한다.
조창은 조세미의 수송을 위해 수로가에 설치했던 것으로 고려 성종 11년(992)부터 조선 말기까지 계속 실시됐다.
공세리 조창지에 대해서는 《대동지지》, 《여지도서》,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이 있다. 조창지가 자리잡은 공세리 일대는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논이 있지만 과거엔 서해 바닷물이 바로 마을 앞까지 들어왔다. 한 줄기는 공세리 북쪽에서 안성천과 만나고, 또 한 줄기는 공세리 서쪽에서 삽교천과 연결되고 있는 수로 교통의 요지. 이 물길을 이용해 곡창에 보관하던 세곡미를 서울로 운반했다. 이를 위해 15척의 조운선과 병사들을 뒀다고 한다. 영조 38년(1762) 충청도 해운판을 폐지함으로써 곡창도 없어졌다.
지금은 곡창을 에워싸고 있던 석축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성안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고 인주면 농협창고 등이 들어서 곡창지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기록에 따르면 규모가 80칸이나 됐다고 하니 성 안 전체에 걸쳐 창고가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공세리 성당
(조선시대 1897년)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성당은 조선시대 40개 고을의 조세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창고 건물은 80간으로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됐다가 고종때 헐리고 그 자리에 1897년 성당 및 사제관이 들어섰다.
공세리 성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뤘다.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 신부가 1년만에 전임하면서 초대에 이어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를 닦았다.
그 크고 화려함으로 당시 아산지방의 명물로 소문나 멀리서까지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던 현재 성당 건물은 그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면서 지은 1921년도 성당이다.
길에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길게 뻗어 있는 한편으로 성당이 자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는 갈림길이 나선다. 박의서(사바스), 박원서(마르코) 그리고 박익서(본명 미상) 삼형제의 순교자 묘가 나란히 있는 옆으로는 성모상이 건립돼 있다.
이곳에 안장돼 있는 박씨 삼형제는 겨우 그 이름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몇 가지 행적이 있지만 어떻게 살다가 죽어 갔는지 상세하게 전해 내려오지는 않고 있다.
성당 옆 한적한 오솔길에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14처가 마련돼 있다. 십자가를 지고 피땀을 흘리신 예수와 같이 우리 선조들도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시대가 가져온 험한 박해의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온 성당 옆에는 오래된 고목이 한 그루 있다. 그 연륜을 알 수 없는 고목은 공세리 본당의 긴 역사를 그저 무심한 듯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