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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영국언론인

8월의 독립운동가 베델(裴說·E.T.Bethell·1872.11.3~1909.5.1)

등록일 2014년08월05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8월의 독립운동가 베델선생. 독립기념관(관장 김능진)과 국가보훈처는 ‘베델’ 선생을 2014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8월 한 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상(제5·6관 통로)에서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갖는다.

베델 선생은 1872년 11월3일 영국 항구도시 브리스톨(Bristol)에서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 일본 고베(神戸)로 건너갔다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영국 ‘Daily Chronicle(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통신원에 임명돼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후 선생은 특파원을 그만두고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했다.

선생은 이 신문의 발행인으로서 영국인의 치외법권을 방패막이 삼아 일본의 침략행위를 폭로하는 항일언론활동을 벌이며 배일사상을 고취했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글을 게재하고, 영국 신문 ‘London Tribune(런던 트리뷴)’에 전달된 고종의 밀서 사진을 크게 실어 을사늑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일제 통감부는 영국 측에 선생에 대한 처벌을 여러 차례 요구했고, 이에 영국은 1907년 10월 상하이에서 영사재판을 열어 선생에게 3주간의 금고형을 선고했다.

한편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양기탁에게 국채보상의연금 횡령혐의를 씌워 구속했고, 친일신문들은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사실무근의 기사를 무차별적으로 보도했다. 선생은 여기에 맞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고 허위 보도한 신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싸웠다.

항일 언론활동을 계속하던 선생은 1909년 5월1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어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정부는 선생이 한국의 독립과 언론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기리고자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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