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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자의 진실

김성열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등록일 2014년02월1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애국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국가(國歌)로 사용해오고 있다. 애국가는 광복69년을 맞는 2014년 현재에도 작가 미상이다.

애국가는 무궁화 태극기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가 상징중의 하나이다. 국가상징 애국가 작사가를 고증이 가능함에도 지금껏 무시하는 것은 나태함이라고 생각한다.

애국가 사료를 분석해보면 애국가는 단독의 작사보다는 윤치호,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민족지사들이 창작하고 보급했던 민족의 노래임을 알 수 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의 작자 확정을 위해 최남선을 위원장으로 하는 심의 위원회를 만들어 5명을 심사했다. 관련된 증언과 문헌, 당사자들의 주장 등을 종합한 결과 당시 윤치호 독립협회 회장이 가장 유력한 작가가로 추정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윤치호 단독 작사설을 확정하고자 표결을 거쳤으나 11대 2란 결과를 도출했다. 이에 윤치호 작사설은 만장일치가 아니란 이유로 부결, 지금까지 작가 미상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윤치호 작사설의 근거는 1908년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란 책의 14장에 애국가가 수록되어 있고, 1910년 미주에서 발행된 신한민보 기사에 애국가 가사가 윤치호 작이란 이름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윤치호 작사설을 부정하는 가장 큰 목소리는 도산 안창호 설이다. 안창호가 작사가라는 주장은 안창호가 선천예배당에서 금식기도를 마친 뒤, 성령의 감화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는 애국가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상해 임정에서 애국가가 국가로 채택될 수 있도록 가장 노력했다는 점, 안창호 주위 사람들의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안창호 작사설은 안타깝게도 문헌적 근거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혜문스님은 얼마전 국사편찬위원회의 1955년 애국가 심의 자료집을 살펴보다가 최남선이 '1907년 윤치호 작이 진(眞)이라면 윤씨 작이라 하여도 무방(無妨)할 것이다'라고 기록한 부분을 발견했다. 이 구절은 윤치호가 직접 붓으로 쓴 친필 본 애국가 가사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친필 본 애국가에는 자신이 작사가임을 명기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윤치호는 분명히 애국가를 자신이 작사 했다고 문서를 남겨 놓은 부동의 증거인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작사가가 직접 남긴 애국가라면 원본 수준의 엄청난 가치를 갖는 기록물일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윤치호의 친필본 애국가 가사지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로 인정받지 못하자 후손들이 1997년 윤치호의 모교인 미국 애틀랜타의 에모리대학에 윤치호 애국가 원본을 기증해 버렸다고 한다. 많은 문헌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윤치호는 왜 정부로부터 애국가 작사가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윤치호가 일본이 도발한 대동아 전쟁에 우리 한민족 동참을 호소했던 반민족 친일파로 규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사실과 윤치호가 반민족친일행위자란 사실은 별개의 사실이다. 역시 대표적인 반민족 친일행위자의 한 사람인 박영효가 만든 태극기가 국기로서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가을 혜문스님은 에모리대학에 서면으로 애국가 원본을 보고 싶다는 열람신청서를 보냈다. 훼손 우려 때문에 보여줄 수 없다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에모리대학측은 사진촬영 불허란 조건으로 2014년 1월 30일 원본열람을 허가했다.

윤치호가 여러 명의 애국가 작사가 중의 하나라면 윤치호 친필본은 당연히 한국에 소장되어야 한다. 친일파란 이유로 애국가 작사가란 사실이 부정되어선 안 되며, 친일파 작사 애국가이기 때문에 작가미상 상태로 남겨 두려고 해서도 안 된다. 더 이상 작사미상의 애국가를 방치할 수 없고, 애국가 작사가의 애국가 친필본이 미국에 있다는 모순된 사실도 방치할 수 없는 일이다.

해방 70년을 맞는 이제는 작사미상의 애국가의 작사가를 정부가 확정해 주어야 한다. 애국가 작사가 윤치호의 친필 애국가 가사문서를 대한민국이 볼수 있어야 한다. 하늘샘교회 역사관에서는 에모리대학 한국인교수,학생들과 연락하여 애국가 가사문서,사진을 수집하려한다.

윤치호 박사는 1903년 천안 군수로 부임하여 천안지역 개화 개명 독립정신을 일깨운 선각자이다. 천안읍감리교회(서릿말) 설립을 위한 기도 돌을 놓았다.

그후 천안읍감리교회가 세워지고 천안예배당(서릿말), 천안교회(문화동), 제일교회(문화동), 중앙교회(성황동), 하늘중앙교회(백석동), 하늘샘교회(풍세로)로 발전했다. 애국가는 천안 군수 윤치호선생이 작사했다고 믿는다.

민족 선각자 윤치호 천안군수

애국가작사자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윤치호박사가 유력한 인물이었다.

윤치호 박사는 1903년 7월6일(관보)에 천안 군수로 발령 8월 7일자로 부임했다. 직산 군수도 겸임하면서 경부선 철도 검봉관을 겸임하였다. 대한제국에서는 외부협판(1895), 학부협판(1895), 탁부협판, 의정부 참의, 황실 최초 미국공사 선교사 통역관이었고 감리교 장로였다.

그리고 독립협회 회장(1898), YMCA 총무 회장(1912), 연희전문 교장(1912),학교,교회설립자 애국가 작사로 알려진 찬미가 발행(1912) 등 수 많은 독립자강 단체를 창립하고 이끌어 가면서 일제시대에 저항하는 역사 소명이 투철한 올 곧게 산 석각자였다.

기독교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 주모자로 구속 복역하기도 했으며, 일제로부터 외부대신 서리를 제의 받고 거절한 충절인물이다.

윤치호 장로는 천안 군수로 부임하면서 천안지역감리교회 입장 양대, 수신 장명, 병천 지령리교회 지도자들과 회동하고 천안지역의 중심 연락처가 될 천안읍교회(서릿말) 설립 준비를 발의한 기도회를 주선하였다.

1903년 천안읍감리교회(서릿말)을 발원으로 천안예배당(사직동), 천안감리교회(문화동), 천안제일감리교회(문화동), 천안중앙감리교회(성황동), 하늘중앙교회(백석동), 하늘샘교회(구룡동)으로 이어 110년 역사가 전승되었다.

물을 수 없으면 짖지도 말라는 좌우명은 일제시대를 온 몸으로 저항한 최고 지성인 윤치호 장로의 고뇌에 찬 힘의 정의론이다. 이는 힘없고 미개하고 가난한 민족이라서 나라를 잃고 일본인들 식민지로 백성들이 억울하게 차별 대우받는 현실을 분개 반발 대항하는 피 맺힌 절규이다. 억울하면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이 없는 민족이라 나라를 빼앗기고 무시 차별지배 받을 수밖에 없다.

저열한 민족성은 나라를 쇠퇴시키고 나라를 망쳤고 힘 있는 일본에게 식민지 노예로 전락했다. 저열한 민족성은 게으름, 불결함, 허영, 이기심, 공공정신 결여, 단결력 부족, 분파주의, 지역감정, 노동천시 폐습 등이다.

저열한 민족성을 개조하는 덕목은 성실, 정직, 신용, 공공정신 그리고 허영을 버리고 실행하면서 착실하고 솔직한 말을 하고 근로정신을 고취하고 노동천시 폐습을 타파하고 경제 자립 능력 양성을 집중하자 했다. 곧 자강불식(自强不息), 실사구시(實事求是)이다. 자치 자강운동을 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 기술, 산업 능력사회 민족으로 개혁 교육하여야 한다.

실업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설립하고 국민정신 계몽, 개화교육, 민족정신 개조를 외쳐 부르짖는 거룩한 분노와 의분을 역사적 시대정신 사명으로 불태웠다. 내선일체가 불가하다. 민족적 전통과 정서를 유지해야 하며 민족독자성과 정체성을 무시할 수 없다. 민족차별 정책을 철폐하고 일본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힘없는 현실에서 독립투쟁운동은 무모하고 불용할 뿐이다.

힘 있는 도덕적 독립운동 정치적 독립을 이루어 다민족 대국가 大 東方主義(대 동방주의)를 주창했다. 일제에 온 몸을 던져 역사와 시대 중심에 분명하게 두텁고 굵은 자취를 남겨 논 의분의 선각자였다. 친일 역사인물로 몰아 정죄할 수만은 없는 인물이다. 역사적 인물을 정죄할 수 있는가 생각하는 지성이 필요하다.

역사의 인물을 주관적 의식과 어떤 목적이나 이념 또한 편협 된 주관을 가지고 평가 비하 비평 규탄 비판하는 졸렬한 자세를 접어두고 성숙한 역사의식으로 평가해야 한다. 역사는 절대적이기 보다는 개연성이 있다. 역사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려는 뜻을 찾는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국가가 없던 시대 민족과 민족성에 매달렸던 고독한 석각자의 고뇌를 우리시대에 QT로 삼자. 그 시대를 온 몸으로 암울한 현실을 겪으면서 고뇌하고 의분하며 시대정신이 충실한 씨알이었다.

역사의 사실을 입체적으로 보고 전체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의 눈과 의식이 필요하다. 내가 그 시대에서 겪어야 할 가능성과 우리 모두가 같이 겪어야만 했던 현실을 공동체 역사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 없는 백성을 붙들고 윤치호 군수는 힘겨운 역사의식 시대정신 갈등을 겪었다.

윤치호군수가 유학했던 에모리대학에 애국가 작사 친필본이 보관되어 있어 지인을 통해 친필본 사진을 부탁해 놓았다.

윤치호 군수의 민족성 개조론과 물수 없으면 짖지도 말라는 좌우명 그리고 힘이 없으면 억울하게 당한다. 실질적인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절규를 오늘 우리 역사적 시대정신으로 전승한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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