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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2·9의거'에 대하여

김성열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등록일 2014년01월27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우리 민족은 지나온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이 바르고 참된 삶이며 진실로 자손을 위하여 결단을 내려야했던 절박한 때가 많았다.

천안 우리고장 어른들은 일제의 압박과 설움에서 민족 자유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시대정신으로 1946년 2월 9일에 반공의거를 일으켰다. 1946년 새해를 맞아 혼미한 정세는 신탁통치 찬·반의 갈림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전략대로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전국은 혼란에 빠졌으며 우리 민족의 앞날이 점점 막막해져 가기만 했다.

2월8일 오후 3시경 천안 목천 흑성산에서 발생한 원인 모를 산불은 천안의용소방대원들을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했다. 흑성산 산불진화작업이 끝난 후 모든 대원은 큰 재빼기에 있는 서울식당에 모여 심상치 않은 국내정세와 천안의 긴급상황에 대한 정보가 절박하게 논의되었다.

이때 수도 주물공장이 좌익계 노동자들의 습격을 받고있다는 긴급한 상황을 연락받고, 젊은 소방대원들이 좌익계 테러분자들을 물리쳤다. 당시 천안의용소방대 제2부장이었던 유필남 부장은 천안의용소방대가 나라와 민족 그리고 천안향토를 위해 궐기·의거해야 할 엄숙한 임무를 절감하는 상황을 설명했다. 일본, 만주 해외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 김두환, 이종걸은 천안군당인민위원장, 방한두 부위원장, 이병국 조직책, 임두빈 내무서계장, 오세환 청년부장, 서광숙 행동대원, 정갑용, 김태익과 접선하고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선동공작은 물론 천안 지하조직 공산주의자 공작원들과 합세하여 조직을 강화했다. 공작원들은 우익 인사들을 테러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요소요소에 조직을 배치하고 있다는 엄청난 음모를 폭로하였다.

우리 고장 신탁통치 반대하는 지도자들이 공산주의들에게 무모하게 희생당하게 방임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천안의용소방대가 미리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을 분쇄하고 조직을 소탕해야 한다고 절규했다. 참석한 대원들은 긴박한 상황을 절감하고 결연히 의거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8일 저녁에 결행하기로 의견을 일치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조직 공작활동의 은신장소인 흥아산업, 수도주물공장, K.T.C(한국트럭회사)의 노동자들 속에 숨어 있었다. 천안의용소방대는 3개편대로 행동조직을 편성했고 광복청년단원들이 거사에 합세하여 동조하였다.

8일 날 밤 먼저 신탁통치 찬성 주모자이며, 좌익지도자인 당시 인민위원회 노동책이며, 자유신문 지국장이었던 최종순의 집을 급습하고 체포하여 경찰에 인계하였다. 그리고 가택수색하는 중 우익인사 테러 살해대상 명단을 입수하게 되었다. 테러 살해하려 했던 인사 중에는 당시 천안경찰서장이었던 정석우 선생, 천안군수였던 유광준 선생, 천안의용소방대장이었던 김광수 선생, 반탁위원장 윤길순 선생, 조흥은행지점장 이병흠 선생, 남창당인쇄소 남응원 선생 등 지방유지 지도급 인사 30여명이었다.

2월 9일 의용소방대원들과 광복청년단원들은 최종순의 집에서 입수한 증거내용을 확인하고 행동에 들어갔다. 수도주물공장, 흥아산업, K.T.C를 일제히 급습한 대원들은 공장노동자들 속에 숨어있는 공산당원들을 색출, 소탕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도주하여 뿔뿔이 흩어져 좌익세력이 무너지고 유혈충돌의 절박한 위기는 차츰 가라앉게 되었다. 9일날 하오 주동자 김두환이 전 문화원 옆 천왕사, 당시 대흥사에 처 김동일과 같이 은신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급습하였으나, K.T.C급습 소식을 미리 간파한 그들은 이미 도주하였고, 광속과 다락에서 다량의 무기와 흉기를 노획하였다.

11일 천안의용소방대원들과 광복청년단원들은 성환에 진출하여 성환의용소방대 반공투사 조귀실, 송범용, 장갑준, 이종석 동지들과 합세하여 성환에서 공작 활동하는 공산주의자 이종걸, 정선용, 정근용을 체포하여 천안경찰서에 인계하였다.

이렇게 하여 천안, 성환의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인사를 테러 살해하려는 폭동계획은 사전에 평화적으로 진압되었다. 신탁통치 찬성 반대 혼란 정세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혈난동을 일으켜 테러 살해하는 엄청난 사건이 희생자 없이 사전에 제거되어 소탕한 평화 무혈 반공의거는 우리 고장 어른들의 자랑스러운 시대정신이었다.

2월 24일 대동신문과 전국 노동자신문은 최초로 좌익 소탕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졌다고 대서특필 보도했으며 이 의거를 일컬어 「천안2.9 반공의거」라 했다. 그 후 2.9의거는 주위에 알려졌고, 우익 인사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으며 이에 힘입어 2.9의거는 이웃 아산, 평택, 안성까지 확산 진출 지원하여, 공산당원 소탕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미 군정포고령 제1호 ‘난동 및 파괴행위 금지위반’이라는 죄명으로 2·9의거 주동자였던 윤길순, 김광수, 이한종, 김민웅, 유필남, 이창중, 이달종, 성낙수, 배순복, 이환국, 방성근, 조귀금, 이원봉, 신기용, 이강연 선생 등 15명은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끌려가 억울하게 조사 문초를 당하고 재판까지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집행유예 3년부터 벌금형까지 실형선고를 받게 됐다. 어처구니없는 미군정 혼란 정세 속에서 이 사건의 판결은 대법원까지 이어졌는데 결국 우익측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7월 8일 우리 고장 천안이 인민공화국(북한) 수중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1946년 2·9의거 당시 극적으로 피신하여 월북했던 오세환, 임두빈 등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은 인민군과 같이 천안에 다시 돌아오게 됐다. 그들은 2·9의거 인사와 가족들에게 악랄한 만행을 일삼아 공포와 초조감에 떨게 하였으며 2·9의거 관계인사 전원은 살을 찢는 고문을 당했고 잔인하게 살해된 애국인사들은 윤길순, 최력산, 이갑복, 정영보, 이규경, 홍병렬, 송하영 선생 일곱어른들이었다.

무혈평화로 감행됐던 2·9반공의거는 마침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혈, 잔악무도한 살인만행으로 이땅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원한을 심어놓았다. 반공의거는 자유수호정신이며 평화정신이며 인권과 인간의 행복을 지키려는 향토정신이었다.

천안향토인 들은 2·9의거의 시대정신을 이어받아 진정한 향토사랑과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영광된 통일선진조국을 창조하는데 총력을 경주해야 할 각오이다. 천안2·9반공의거는 천안의 시대정신이다. 반공은 아직도 우리시대정신이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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