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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홍경사사적비갈 소고

<김성열 천안시 역사문화연구실장 역사칼럼>

등록일 2013년06월21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옛날에는 직산군 땅이었고 현재는 천안시 성환읍 대흥리로 불리는 이곳에 1962년에 국보 제7호로 지정받은 비갈(碑碣)이 비각(碑閣)안에 보존·관리되고 있다.

성환과 평택을 오가는 길목의 넓은 들녘은 인가도 없고 갈대만 우거져 있어 도적들이 지나는 행인을 괴롭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비문에 부왕인 안종(安宗)의 불심이 극진하여 법화경을 읽고 깊이 느껴서 절을 세우려 했던 뜻을 받들어 고려 현종(顯宗)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다.

길손의 편리를 도모하고 불법을 선양하고자 하는 뜻을 밝히며 1016년에 시작하여 1021년에 완공하였다. 절의 이름은 부왕의 뜻을 받들었다는 의미로 봉선(奉先) 홍경사(弘慶寺)라 하고, 홍경사 절 서쪽에 객관 도합 80칸을 세우고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는 원(院)을 조성하고 양식을 쌓아놓고 마초를 저장해서 행인들에게 제공하였다.

1176년 명종6년에 공주의 천민 망이·망소이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민란때인 1177년 3월에 봉선 홍경사와 광연통화원, 속칭 홍경원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갈비(碣碑)만이 남아있다. 비문은 고려조 최고의 문장가인 최충(崔沖)이 짓고 당대 최고의 문필가인 백현례(白玄禮)가 썼는데 우리나라 현존 사적비로 가장 완전한 형태라 한다.

지금 사지(寺址)에는 사적비(事蹟碑)가 1978년에 건립된 보호각(비각)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탑재의 일부와 1981년에 국역비를 세워 놓았다. 갈비(碣碑)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들을 따로 얹지 앉고 비 몸의 윗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비는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 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게 한다. 비 몸 돌 앞면 위쪽에는 봉선 홍경사 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비신을 받치는 귀부(龜趺)의 어룡이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절터의 건물과 비석의 방향이 성거산, 왕자산을 일직선으로 바라보고 있어 이를 피하게 하려고 어룡의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 것이라 본다. 그리고 어룡은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하므로 영원히 이곳에서 비석을 떠받치라고 현종이 어명을 내린 것이라 해석해 본다.

전해오는 일화에 비 갓 위에 돌 세개를 던져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아들 없는 여인들이 돌을 던져서 비 갓 위에 올려 놓으려고 돌을 많이 던져 비 갓이 파손되었다고 한다. 일제 때에 일본 기마병이 홍경사비 앞을 지나면 말이 어룡을 보고 놀라 뛰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고려 태조 왕건이 도솔땅을 답사할 때 직산현 수헐리(시름새)에 잠시 머물러 한 숨을 돌리면서 위례산성을 바라보게 되었다. 보니 오색구름이 영롱하여 신선이 살고 있는 산이라 제사를 지내게 하고 왕건왕이 태어난 개성 송악의 성거산과 모습이 같다하여 성거산(聖居山)이라 부르게 했다.

2010년 홍경사 터 1만6000㎡를 고고학조사를 하여 건물 터 구간의 주춧돌 및 건물지 명문기와 등이 확인되었다. 국보 제7호로 지정받은 문화재가 있는 주변 소사평, 홍경원들 청망이 들이 개발제한을 받아 버려져 있어 안타깝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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