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제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 소지왕(487)때 우역(郵驛)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표를 처음 발행한 나라는 영국(1840)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고종황제때(1884) 우정국을 설치하고 우편제도를 실시했다. 천안, 직산, 목천에 임시우체국을 창설하고 천안군청에서 우체주사가 체전부를 두고 등기통상우표를 판매했다.
임시우체국에서 매일 발송하고 군수가 우체사장(司長)을 겸임·감독했다(1897). 1901년에 천안군 임시우체 주사 오영일, 직산군 주동석, 목천군 박희모가 발령받았다. 경부선 철로를 개통하고 1904년 천안역, 직산역을 개업하면서 천안임시우체소가 오룡동 184 현 오룡동우체국 자리에서 개소했다.
1906년 천안우편취급소에서 천안, 직산 국고출납금고를 전의우편취급소에서 전의, 목천, 연기 국고출납금고를 개시했다. 1906년에 처음으로 금융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대한제국 최초 기념우표가 발행됐다. 1908년에 천안역, 성환역에서 전신취급소가 개설돼 전보 배달한다. 그리고 1909년에 전화통화사무도 개시한다.
1910년 천안우편국으로 이름을 개칭했다가 1949년에 다시 천안우체국으로 이름되어 오늘에 이른다. 1960년 현 대흥동 천안우체국시대에 사명을 다했다. 2012년 청수동 행정타운 천안우체국 시대를 맞는다.
가깝고 멀고간에 소식을 빨리 전하는 일을 하는 곳이 우체소이다. 소식을 전하는 곳의 명칭, 책임자, 관직 대우도, 이름도 그리고 전하는 수단도 시대마다 달랐다.
마음의 소리, 심장의 소리, 마음의 뜻, 심장의 뜻을 전달해 주는 곳이 우편소이다. 그리고 그 일을 맡아 책임지고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집배원들이다. 집배원들은 발품(수고·노력)으로 거리공간을 맡아서 없애주는 힘겨운 일을 감당하는 고마운 공무원들이다. 육신을 움직여 번지수 찾아 이름을 확인하며 하나하나 발걸음 해야 하는 어려운 직업이다.
우체부가 어깨에 메고 다니던 누렁귀신 배달가방은 박물관에 전시돼 옛날을 기억하게 한다. 빨간 오토바이 뒤에 빨간 상자에 우편물을 싣고 다니는 배달부는 집집마다 오토바이를 멈추고 서서 번지를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그에게 맡겨진 일이다.
한 더미 배달물을 모두 끝내고 우체국으로 돌아올 때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때 비로소 신나게 달려본다. 우체부집배량이 계속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공기와 물 같이 정보 속에서 정보로 살고있는 시대에 정보전달 수단은 속도감과 거리감이 없어지고 있다.
모든 것이 틀에 박혀 돌아가고 부속품일 뿐 감정이 없고 여유가 없고 사무적이고 숨가쁜 정보시대이다. 이때에 사랑이 풍성한 글을 편지로 받아보면 정감이 있고 감동이 새로워진다.
만나서 말할 수 없는 사연을 서로 보지 않고 마음 속 깊은 뜻을 전달할 수 있는 글을 편지로 오고가는 우편은 정보 홍수에도 우리생활 속에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빠름 속에 느림이 우리 생활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 우체부는 영원한 싼타크로스이다.
소설 '두만강' 속의 천안우체부
천안 중엄리(안서동)에서 살던 민족작가 이기영 소설 ‘두만강’에서 천안읍내 1903년 실상을 본다.
천안읍내에 제일 먼저 들어온 왜놈은 우편소가 생기면서 소장 원산이와 체부 안본이었다. 이 고을에 맨 먼저 들어왔을 때에 읍내사람들은 그들을 신기하게 대하였다. 그들은 경성 부산간의 비밀전신을 보장하는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정말 그들은 귀신도 모르게 비밀통신으로 서울과 동경간의 중간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청일전쟁(1894)을 승리한 왜놈들은 서울과 인천에다 거류민을 이주시킨 후에 그들의 보호를 빙자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렇게 한걸음씩 침략을 흉책하는 왜놈들은 마침내 조선의 우정권을 탈취하여 경성과 부산간의 전신전화선을 가설하였다. 이에 성공하자 각처에 우편소를 설치하고 동경과의 비밀통신으로써 장래의 노일전쟁(1904)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 경제, 군사 등 각 방면으로 조선 실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본국에로 보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과연 그들은 현대문명의 이기로서 귀신의 조화를 부린다는 것이 결코 허황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옥사자와 같이 누런 복장을 입은 체부가 이따금 밖으로 나올 때는 가죽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데 그 속에는 귀신을 배송시키는 주문이 들어있다는 것도 으스한 말이다.
그것은 한달에 한번씩 서울이 가까운 우편소로 그가 출장을 나가서 월말보고서의 비밀서류를 전달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왜놈의 이런 속을 읍내 사람이나 양반들이 알 턱이 없었다. 그야말로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들은 여전히 태고적 생활을 꿈꾸고 있었다.
왜놈들은 전봇대를 늘어세운 뒤에 측량을 다시 하였고, 전기선이 여러 줄로 늘어가고 그 다음에는 읍내 뒤로 전봇대를 또 한줄씩 세워 나갔다. 왜 전봇대를 쌍줄로 또 세울까? 전기선 줄을 늘이고 측량을 하고나면 또다시 전봇대를 세우고 하였다. 그와 동시에 왜놈들이 푸떡푸떡 기어들었다.
이 고을에도 우편소가 생긴 후에 장터에서 모찌떡 장사를 시작하던 서강풍이와 재빼기에 방 한 칸을 빌어서 이발소를 낸 ‘가다방’이 그 뒤에 들어왔다. 한데 미구에 또다시 도는 소문은 서울과 부산 간에 철로를 놓는다더니 과연 그게 정말이었다. 그때까지 이 고을 읍내의 호수는 불과 2백여호였다. 그나마 대부분이 초가집이었고 주민의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하였다.
경부선 철로공사는 1904년 11월 10일 완공되어 1905년 1월 1일 개통하고 천안역과 직산역이 영업을 개시했다. 1905년 5월 25일 오룡동우체국 자리에 천안임시우편소가 개소됐다. 그 전에는 천안군청에 임시우체담당 주사가 우편업무를 맡아했다.
우표를 판매하고 우편물을 받고, 배달부를 두어 우편물을 배달시켰다. 1908년에는 천안역, 성환역에 전신취급소를 설치하고 일본인 전보직을 두었다. 1909년 천안, 성환우체소에서 우편, 전화, 전신을 취급하고 1910년 천안우편국으로 명칭을 바꾸고 1921년에 전화교환이 개신된다. 천안우편국은 천안 근대화 새 문명 개화의 관문이었다. 1949년 천안우체국으로 오늘의 명칭이 된다.
1903년을 기화로 천안은 새로운 문명으로 개명의 눈이 열리게 된다. 신문, 우편, 철도, 전신, 전화로 하여 귀신이 작란하는 기상천외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새로운 문명개화, 개명 근대화의 물결이 정신없이 밀려들어 온다.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근대화문명의 눈을 뜨게 된다. 이때 1903년 7월 6일 개화선각자 윤치호 박사가 천안 군수로 부임하여 천안을 위해 처음으로 기도한다.
“하늘의 축복이 천안에 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