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할아버지의 그늘
“법관이 될꺼야.”
박문호(57·아산시 영인면) 후보의 어릴적 꿈은 법관이었다.
박 후보는 법률로써 규율을 지켜나가라는 제헌절이 탄생되기 4년 전에 영인면에서 태어났다.
박문호 후보는 박상윤(94년 작고)와 윤정임(83세) 사이에서 1944년 7월17일 팔남매의 장남으로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호적상 나이로는 46년생으로 돼 있지만 출생등록을 맡은 서기의 잘못으로 큰 동생과 불과 6개월차 밖에 나지 않는 불상사가 생기고 말했다.
캄캄한 곳에 한줄기 밝은 빛이 보이는 태몽을 꾸고 태어났다는 박 후보는 “세상에 밝은 빛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 아니냐”며 허허 웃었다.
세상에 밝은 빛이 되기 위해 박문호 후보는 어렸을 적 법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법관이 되면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을 다 도와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법관이 되리라고 마음먹은 데는 교장이었던 할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이 한몫 했다.
한번은 배식으로 나온 우유를 학교 관리인이 다른 아이보다 두배로 박문호 후보에게 주었다. 박 후보는 신이 나서 그것을 들고 집에 가서 자랑까지 했다.
할아버지는 “네가 가져온 그릇이 어떤 거냐” 물으시며 다시 우유를 그 그릇에 담아 박문호 후보의 몫이 아닌 만큼을 돌려주고 오라고 시켰다.
저녁 먹고 난 후여서 밤이 벌써 깊을 무렵이었다. 박 후보는 진흙같이 어두운 밤길을 호롱하나와 동생을 벗삼아 먼 학교까지 다시 가야했다. 왠지 모르게 복받쳐 흐르는 눈물과 콧물이 흘렀다.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갖다주고 오니 할아버지는 잘했다며 칭찬해 주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더 받아서 안 된다는 사실을 무언중에 깨달은 박 후보는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됐다.
큰 손주로 귀여움을 받는 것도 잠깐. 박 후보는 평생에 한으로 남을 아픈 상처가 생겼다.
초등학교때 그는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다가 떨어져 척추를 크게 다쳤다. 병원이 귀했던 시절이라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척추에 능막유착이 생겼다. 그 뒤부터 허리가 구부러져 항상 몸을 숙이고 다녀야만 했다. 휜 허리 탓에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꼽세’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척추 탓에 그렇게 가고 싶었던 군대도 가지 못한 것이 박문호 후보의 한으로 남았다.
그러나 마음이 자라면서 이 별명은 훈장이 되었다. 장애인이나 저소득층 자녀만 봐도 도와주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계기를 만들어줬기 때문.
중고등학생 시절에도 어려운 이웃만 보면 몰래 쌀을 퍼다 주는가 하면 장작을 패다 주기도 했다. 익은 곡식처럼 낮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굽은 허리를 통해서였다.
체육을 좋아했지만 많이 뛸 수 없던 어린 시절. 남다른 재주로 미술과 서예에 소질이 많았다. 초?중고 때는 그림에 소질이 많아 미술대회에 크고 작은 상에 입상했다. 지금도 아산시를 한 폭의 그림처럼 설계하고 싶다는 것이 박문호 후보의 꿈.
법관의 꿈을 벗고 아나운서로
말수가 적었던 고등학교 시절. 법관이 되리라는 꿈은 언제나 같았지만 그를 크게 변화시킨 연설회가 있었다.
당시 최고의 아나운서로 불렸던 임택근씨가 학교 연설회에 온 것이다. 멋진 목소리와 우렁찬 그의 목소리는 박문호 후보를 매료시켰다. 박 후보는 서라벌예대 방송과로 진학했고 아나운서로의 꿈을 키워갔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장남의 선행행각에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
박 후보는 대학교때 어머니에게 크게 혼이 난 기억이 있다. 1년 동안 지은 농사 이문으로 아들을 위해 점퍼를 사주었다. 박 후보도 제일 아끼는 옷 중 하나였지만 길을 지나다 너무 얇은 옷에 아기를 안고 가는 아주머니가 있어 옷을 벗어주었던 것이 화근. 겨울옷만 사주면 박 후보가 옷을 벗어주다 보니 집안은 박 후보의 옷값을 대느라 뼛골이 아플 지경이었다.
졸업 이후에는 꿈과는 다르게 수원농업진흥청에 3년간 근무를 했다.
간접적으로 농사를 짓는 것도 배우게 됐고 농업에 대한 지식도 키워갔다. 당시에는 통일벼를 심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아산에 볍씨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소장에게 호소하면서까지 아산으로 볍씨를 가도록 했다. 씨가 귀했던 시절이라 동네에서 박 후보의 인기가 좋았다.
3년간의 농촌진흥청 업무를 접고 72년부터는 그의 전성기를 맞게 됐다.
박 후보의 꿈인 광주CBS 방송국 아나운서가 됐기 때문. 그것도 그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인 배구 중계까지 맡게 되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방송국 숙직하던 날 한 여성이 피를 흘리고 사지를 얻어맞은 채 방송국에 들어와 모 공무원 4명에게 차를 배달하다 윤간을 당했다며 달려왔다.
정의감에 불타는 마음으로 당시 안기부의 사전 방송검열도 받지 않은 채 이 사실을 보도했다. 이런 사건을 보도한 언론매체가 없었던 만큼 당시에는 커다란 파장을 일으켜 이 보도에 책임을 지고 박문호 후보는 아나운서 일을 그만두게 됐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아나운서 일은 그만두게 됐지만 윤간을 당한 여인이 보상을 받게 됐고 당시 공무원도 징계하게 돼 보람은 있었다며 회고했다.
서른 네 살에 늦장가
서른 네 살, 박문호 후보는 늦은 나이에 장가를 갔다. 선을 못해도 삼십번을 봤다는 박문호 후보. 성품이 밝고 따뜻한 것이 마음에 들어 이종순(57) 여사를 만나 결혼하게 됐다.
이 여사를 만나 기정(25), 기원(21)씨 두 딸을 얻은 것이 박문호 후보에게 제일 큰 재산이다. 엄격한 가정에서 자란 탓에 자신도 엄격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였지만 마음만은 딸들에게 따듯했다.
이종순 여사는 “엄격하다곤 하지만 항상 자상했다”며 “가끔 웃긴 흉내도 내고 재미난 말로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고.
결혼 이후에는 정당인 활동과 농사를 지었다.
농촌진흥청에 일했던터라 농사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지식이 많아 논에 잘 나가보지도 않고 논의 건강상태를 알았다. 아버지가 “게으른 놈”이라고 욕해도 농사에 대한 자신이 있었다. 그 소신을 밀고 나간 덕에 다른 곳이 흉년일 때 박문호 후보의 논은 알곡이 터질 정도로 여물어 동네사람을 놀라게 했다.
정당인과 농업인 사이
농업보다 어려운 것은 정당생활이었다. 당시 야당이 없었던 터라 말 잘 하는 야당인은 안기부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이 쫓아왔고 무엇을 하든지 의무적으로 알려야 했다.
야당생활이 어려움만 준 것은 아니다. 9년 관선시절 시의원에서 민선에서도 시의원이 된 것이다. 관선과 민선을 거친 시의원이지만 행정은 변한 것이 없다.
관선 시의원 93년 시절 44명의 결식아동에게 1년간 2백50만원을 지급하려는 것을 7백50만원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반대로 97년에는 건설업자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대법원까지 갔지만 혐의가 없었다. 당시에 길을 내기 위해 건설업자에게 돈을 받아 시에게 건네 준 것을 이를 시기한 사람이 고발해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나 뇌물을 줬다는 근거가 없어 무혐의처리를 받았다.
또 99년에는 길에 나갔다가 지갑을 주었다. 6백20만원이 든 지갑이었다. 연락처가 없는 지갑에서 영수증 몇장을 토대로 해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줬다. 지갑주인은 경기도 고양시 사람으로 전세자금을 주기 위해 돈을 마련했다가 길거리에서 잃어버렸던 것.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어려운 사람과 하나된 것 같다”는 박 후보.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한 점 부끄럼 없다. 아산시도 한 점 부끄럼 없는 발전된 도시로 만들고 싶다”고 피력했다.
시의원 생활을 하면서도 청렴성, 도덕성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자신이 머문 자리도 깨끗이 하고 머물러 갈 자리도 깨끗이 해 건전한 사회 풍토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박문호 후보는 오랜 야당생활과 시의원 생활로 인지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통해 편모?편부 슬하의 자녀, 결식아동, 노인, 청소년까지도 안전하게 잘 살수 있는 도시가 되길 바람하며 시장후보의 출사표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