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집안의 개구쟁이
동네 요주의 인물이었던 박진서 후보(57·아산시 온천동)는 개구쟁이 차원을 넘어선 장난꾸러기였다.
듬직한 지금 체구와는 다르게 삐쩍 마른 몸에 까만 얼굴, 눈동자만 반짝반짝 빛났다.
박승돈(80년 작고)씨와 오상희(84년 작고)씨 사이 4남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박진서 후보.
그는 날이 새면 무슨 장난을 칠까. 무얼가지고 놀까로 궁리하며 하루하루가 바쁜 개구쟁이였다. 동네 여자친구들의 놀려먹기는 물론, 딱지치기해서 져본 일이 없고, 골목대장으로 바닥을 휩쓸고 지나다녔다. 그가 나타나는 골목에 “짱구 온다” 소리치면 여자들은 숨고 남자애들은 모여들은 유명한 골목대장이었다.
그러나 철없는 짓은 엄격한 집안에서 용납되기 어려운 법. 엄격한 아버지의 회초리와 알밤으로 하루도 종아리가 편한 날이 없었지만 쉬지 않는 장난끼에 어머니 속을 무척이나 썩였다.
밥 투정도 심해 보리밥으로 지은 도시락을 놓고 가기도 하는 철부지 초등학생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6km의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아들의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찾아왔다. 그가 효자가 된 까닭도 그 때의 일 때문이었다.
박진서 후보는 우애가 깊었다. 매맞고 돌아오는 동생 대신해 나타나는 우직한 오빠였고, 형들이 부르면 달려가는 충직한 부하였다.
4·19혁명 학생운동가
“그때 당시 누구든 혁명을 지지했다”는 말로 박진서 후보는 서두를 꺼냈다.
천안시 공무원이었던 큰형을 따라 그는 천안농고에 입학했다. 고2때인 1960년 “못살겠다. 갈아 업자”며 민족봉기가 일어났을 때 박진서 후보도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총성까지 들리던 혁명 당시 열심히 학우들과 함께 선두에 나섰던 학생이었다.
혁명이 있고 보니 학교가 뒤숭숭했고 학구열은 떨어졌다.
공부보다는 운동을 좋아해 안 해본 운동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운동했다. 그중 축구를 가장 좋아해 틈만 나면 축구하기 바빴다.
젊은 혈기를 발산할 수 있는 사회로 진출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군대에 입대했다. 험난하고 거세다는 해병대에 소속됐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군사의 결집과 조직력.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는 필승의 의지를 다지는 수련장이 되었다. 전우애와 사랑을 꽃피는 것도 이 무렵의 일.
몇통 되지 않은 위문편지가 오간 것이 첫사랑이었다. 만나기도 쉽지 않고 편지 하나로만 족해야 했던 시절에 사랑도 더 이어지지 않았고 끝나버렸다.
큰형의 말에 공무원 공부만 했다. 당시만 해도 박진서 후보는 공직생활에 별로 적응을 못했고 재미도 없었다. 술을 많이 하게 된 것도 사회초년병 시절이었다. 사춘기 때 없었던 미래에 대한 고민도 물밀 듯이 몰려왔다.
건장한 체구 탓에 술을 한번 마셨다하면 말술이기 때문에 누구도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결혼으로 새 인생이 시작되고
술을 잘 마신다는 소문에 아가씨는 좋다고 해도 번번이 그녀의 집안에서 반대하기 일쑤.
건장하고 멀끔한 인상을 가졌지만 박진서 후보의 미래를 보고 투자하겠다는 여자는 없었다.
조영행(57) 여사를 만난 것은 박 후보가 스물 다섯살 때일이다. 동료 공무원인 이종각씨의 소개로 조 여사를 만나게 됐다. 서로 별로 호감을 얻지 못해 맨숭 맨숭 시간만 보냈다는 박진서 후보. 그러나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어설프게 헤어지고 두달 후 우연한 계기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됐다. 장인, 장모에 부딪혀 결혼을 못할 상황이 됐지만 조 여사는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라는 생각에 포기하지 않았다.
만난지 일년만에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 박 후보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다.
다른 곳에서 공직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아산에 대한 사랑과 봉사정신을 키워간 것도 이 무렵이었다. 봉사하면 봉사할수록 할 일이 많아지고 인정 좋고 서로를 위해주는 아산 주민들을 보며 자신을 낳아준 고향보다 더 사랑하게 된 땅이 되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발을 내딛는 길마다 행복했다”고 그는 회고한다.
아들 박찬도(27)씨에게도 자상한 아버지였다. 딸 하나를 더 얻고 싶었지만 부인 몸이 약한 탓에 아들하나를 얻었다. 그러나 외아들이라도 엄격하게 키웠다.
한번은 찬도씨가 초등학교 1학년때 오락실에서 늦게까지 놀다오자 크게 혼나기도 했다. 늘 자상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또 다른 면모를 본 뒤 아직도 무서워하면서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박진서 후보로 꼽는다.
행정이 변할 수 있다면
공직생활을 하면서 행정의 사고가 변하면 아산시가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35년의 공직생활 중 제일 많은 사고의 변화와 행정변화를 본 것은 74년 새마을 운동 관련업무를 맡아보면서였다. 새롭게 개척해 나가며 새로운 세계를 펼쳐나가는 새마을 정신에서 봉사정신의 힘을 배웠다.
보수도 없이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서로가 정 깊게 살아가는 주민들을 보며 감동했고 행정에 보람을 느꼈다.
행정이 봉사활동이고 봉사의 꽃인 것을 알아갈 무렵 김홍식(작고. 70~73년 아산군 재직) 전 아산군수 밑에서 봉직한 적이 있다. 항상 깨끗한 일 처리와 도덕심이 감명 깊었다.
김 전군수가 직원들을 독려하며 다독이는 통솔능력을 지켜보면서 박진서 후보는 흉내내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특히 김 전군수가 가족묘를 공원묘지에 안장했을 때 충격이 컸다. 누구든 좋은 자리에 부모를 안장하려는 것이 자식된 마음이지만 공원묘지에 안장한 것을 보고 감동이 컸다. 박 후보는 이후로 한 점 흩어짐 없는 행정을 펴기에 주력하기에 애를 썼다.
아산신도시 개발을 촉진시키고, 아산의 경기를 부양하고 충남도청을 기필코 유치해야 한다는 박진서 후보.
그런데 그는 도청유치는 모든 여건이 충족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라고 하면서 거기에는 행정책임자의 강력한 추진력과 결단력이 요구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추진력 중 가장 빛나는 부분은 경찰종합학교 유치다. 1년 전 황금알을 낳는 공룡. 경찰종합학교 유치에 성공한 것이다.
“뭐 하나 잘 되는 일 없다가 큰 거 하나 건진 셈이죠. 경기부양 효과도 커서 지역경제 유발 효과는 연간 수백억원에 달합니다.”고 박 후보는 밝혔다.
경제의 판도를 바꿀 경찰종합학교를 성공리에 유치시키는데 있어서 스스로 유치단장을 맡아가면서 까지 끝끝내 성공시킨 사람이기도하다.
당시 경찰종합학교 유치에 전국 50개의 지자체가 나섰다. “정말 피말리는 혈전을 방불케 했다. 그때 분위기로는 사실상 아산은 물 건너갔었던 것 이었다.” 그러나 “막판가지 좀 봐라, 떼쓰고 사정하며 유치를 이뤄냈다”고 박 후보는 회고했다.
박진서 후보가 시장이 된다면 꼭 하고 싶은 일도 행정가의 사고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행정출신이라 기업의 생태를 낱낱이 알 수는 없지만 기업과의 아웃소싱과 기술협력을 통해 행정마인드에 접목시키자는 게 박 후보의 바람이다.
천안과 아산이 거리상으로도 생활적으로도 별 다를 바 없는데 발전속도에 차이를 보이는 것은 큰 틀을 보지 못하는 사고에서 온다고 그는 생각했다.
발전의 속도가 잠시 더딜 수 있지만 기본정신이 바뀌고 난 뒤에는 속력을 내어 도시 전체의 발전으로 뒤바꿈할 수 있다는 것이 박진서 후보의 생각이다.
시장을 출마한다고 생각했을 때 처음에는 두려웠다. 정치란 것도 첫 경험이어서 어색하기도 하다. 그러나 “30년동안 아산시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공직생활을 해왔고 이제 행정에 무엇을 수혈해야 아산시가 회생할 수 있는지도 깨달았다. 행동과 실천만 남았다”며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박 후보는 유권자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