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시는 <현대로> 결정과정에 주민의견수렴 절차를 거쳤다고 주장하지만, 인주면과 염치읍 이장단에서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우리 마을 주소가 도대체 왜 ‘현대로’로 바뀌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수 백 년간 내려온 마을 고유지명을 송두리째 없애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이 우리지역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현대자동차가 들어온 후 교통량이 늘면서 매연, 소음, 교통사고에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승용차를 가득 실은 대형화물차들이 덜커덩 거리며 마을 앞길을 달릴 때마다 무서워서 못살겠다. 그런데 이제는 마을 이름까지 빼앗아 버리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2006년2월13일 <현대로>라는 명칭이 처음 생겨났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지명위원회를 거쳐 결정된 사항이지만 주민들의 의견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산시장을 위원장으로 공무원이 과반수이상을 차지한 지명위원회는 시장의 의지대로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현대로>로 명칭을 변경한 이유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으로 향하는 도로에 아산시의 기여도와 인지도를 참고해 도로명을 부여했다”는 것이 아산시의 설명이다.
지명위원회는 다시 새주소 심의위원회로 형식이 바뀌었지만 이들 역시 과반수이상이 부시장을 비롯한 현직 공무원들로 이뤄졌다. 그리고 나온 지명이 <삼성로>다. <삼성로>는 탕정면 갈산리부터 음봉면 덕지리에 이르는 5㎞구간이다. <삼성로>를 도로명칭으로 부여한 이유는 “삼성은 아산시에 기여도와 인지도가 크고, 기존에 없던 도로명을 새롭게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밝혔다.
아산시의 한 관계자는 “당시 지명을 변경할 때 전문가, 이장회의, 아산시소식지, 인터넷 등을 통해 주민여론을 수렴한 결과 <현대로>와 <삼성로>에 대한 이의신청이 없었다”고 말했다.
인주면 관암2리 '은고개' 마을이 <현대로 1120길>로 바뀌었지만, 주민들에 대한 의견수렴 절차 없이 진행돼 주민들의 불만이 높다.
아산시 기업도로명은 <현대로>와 <삼성로> 두 곳이다. 또 대학도로명도 <호서로>와 <순천향로> 등 두 곳이다. 기업과 대학의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이용한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또 다른 기업과 대학에 의한 형평성 논란의 여지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최근 지역 이장단협의회에서는 <현대로>에 대한 강한 불만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들이 “왜 이제 문제제기를 하는가” 라는 질문에 “<현대로>라는 이름이 지어지는 것 자체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
인주면 공세리 한기영 이장은 “아산시가 인터넷과 아산시 소식지를 통해 20일간 이의신청을 접수받았다고 하지만 정말 무책임한 말이라는 것은 본인들이 더 잘 알 것”이라며 “인주면은 고령의 농업인구가 대부분인데 컴퓨터를 다룰 줄도 모를 뿐만 아니라 바쁜 영농철에 그러한 일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라고 비판했다.
적게는 수 십 년에서 길게는 수세기 동안 불려진 마을이름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곳곳에서 새주소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정부에서 각종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새주소는 과거의 무질서하고 복잡한 주소체계를 도로와 건물명을 혼합해 알기쉽고, 찾기 쉽도록 바로잡겠다는 의도다.
정부가 추진하는 편의성과 효율성 이면에는 지역정체성을 우려하는 반대목소리도 적지 않게 들린다. 또 같은 마을의 골목길에서도 주소가 서로 달라 혼선도 발생하고 있다.
‘골’ ‘재’ 등 고유지명 모두 사라져
인주면 관암리 마을회관에 붙여진 건물번호
<현대로>는 ‘염치읍 염성리’를 시작으로 ‘인주면 신성리’까지 연결된 14㎞구간이다. 최근 아산시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도로명주소 안내를 시작하면서 주민들의 반발이 표면화되고 있다.
인주면 관암2리 ‘은고개’ 라는 마을 이름은 <현대로 1120번길>, 해암3리 ‘한절골’ 이라는 마을 이름은 <현대로 939번길>로 바뀌었다. 밀두리, 해암리, 관암리, 문방리, 강청리 등의 각종 ‘골’ ‘재’ 등의 고유지명이 <현대로 ***번길>로 바뀐 것이다.
현대로와 인접한 건축물은 <현대로 ***> 이라는 건물번호가 부여됐고, 마을 안길을 지나서 만나는 개별주택은 <현대로 ***번길 ***>이라는 건물번호가 새겨졌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와 맞서 싸우다 사망한 형제의 무덤에서 소나무가 자라났다는 전설을 간직한 형제송 입구도 ‘현대로’로 바뀌었다. 해암3리 ‘한절골’ 마을회관은 <현대로 939번길 1>로 바뀌었다.
도로명칭 뿐만 아니라 도로에서 이어지는 곁길과 마을안길, 개개인의 주택 등도 모두 <현대로> 라는 새 간판을 갖게 됐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인주면 주민들은 처음에는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마을이름 간판이 세워지자 상황을 알고 나서 분개하고 있다.
최근 인주면 이장단회의에 참가한 한 이장은 “현대자동차가 아산시에 대한 기여도와 인지도가 얼마나 큰지는 몰라도, 현대와 직접 인접한 지역주민들에게는 피해만 주는 골칫거리에 불과하다”며 “교통량이 증가해 늘 소음, 먼지, 매연, 교통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다. 우리는 현대가 우리지역에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장은 “백번 양보해 현대자동차 위치확인을 위해 큰 도로명칭을 <현대로>라고 하는 것까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마을 안길과 주택까지 <현대로>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염치읍, ‘도로명주소 설명자료’ 항의 반납
<현대로>는 염치읍 염성리부터 인주면 신성리에 이르는 14㎞구간으로 마을 안길까지 차지해 현지 주민들의 반발이 크다.
염치읍은 이장단협의회에서 ‘현대로 도로명칭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염치읍 산양1리 문종성 이장은 “인주면에 있는 현대자동차와 염치읍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염치읍 마을 안길까지 ‘현대로’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염치읍 산양2리 강길선 이장은 “같은 골목의 아래윗집이 길을 사이에 두고 ‘산양길’과 ‘현대길’로 나눠져 있다. 새 주소가 한 마을을 분리하면서 혼란스럽기도 하고, 지역정서와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으로 향하는 차량통행이 급증하는 바람에 우리마을 앞에서 병목현상이 생겨 주민들 불편이 크다. 게다가 우리 마을은 조상 대대로 농사만 지으며 살아온 마을이다. 집집마다 갑자기 현대로라는 간판을 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염치읍 채수창 이장협의회장은 “‘샘골’ ‘강청골’ ‘사원골’ 등 마을이름이 얼마나 예쁘고 좋은가. 고려때부터 불려진 마을이름을 주민의견도 묻지 않고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지역의 정체성이 담겨있는 고유지명을 활용해서 새주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31명의 염치읍 이장들은 <현대로>에 대한 항의 표시로 ‘도로명주소 설명자료’를 반납하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길 이름에 지역정체성과 역사성 살려야
아산시는 탕정면 갈산리부터 음봉면 덕지리에 이르는 <삼성로> 구간에 대해서는 신설도로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지만, 현지 주민들에게는 반 삼성분위기가 적지 않다. 시민단체에서도 지역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며 우려를 표했다.
아산시 토지관리과 황영순씨는 “새주소 사업은 도로에는 도로명을 부여하고 건물에는 도로를 따라 순차적으로 건물번호를 부여해, 도로이름과 건물번호만 알면 초행길도 쉽고 편리하게 찾아 갈 수 있도록 바꿔주는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주소방식으로 전환해주는 사업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현대로>와 <삼성로>도 마찬가지로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방문객들이 가장 찾기가 쉽다고 생각해 도로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안다”며 “현재 우리나라가 이용하고 있는 주소체계는 1918년 일제강점기때 도입해 100년간 사용된 것으로 지번의 순차성이 훼손돼 낯선 곳에서 길 찾기가 매우 어렵다. OECD와 같은 선진국가들 중에서 지번주소를 사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밖에 없는데, 일본은 1962년부터 도로명 주소를 도입해 점진적으로 바꾸고 있는 추세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찰·소방 등 치안·응급구조의 현장 대응력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다”라고 말했다.
이에대해 아산시민모임 김지훈 사무국장은 “길은 연결돼야 하고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소통이 있어야 한다. 자연과 땅의 높낮이, 생김새에 따라 그 마을의 이름이 지어지고, 불려졌다. 그리고 정감 있는 언어로 불려왔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가장 큰 공장건물, 세금 많이내는 기업 이름만을 쫓아가는 것이 올바른 가치부여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현대나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이고, 지금 당장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인주면이나 탕정면의 정체성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지역주민의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아산시의회 오안영 의원은 “도로명칭 부여에 대해 신중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해석하다 보니 문화나 전통, 역사와 미래가치에 대한 판단이 미흡했다”고 말했다.
새 주소는 종전 지번주소와 읍·면까지는 같지만 ‘동·리+지번’ 대신 도로명과 건물번호를 사용하게 된다. 2010년12월~2011년2월까지 3개월간 미비점을 보완·개선한 후 내년 3월부터 전국에 일제 고시될 예정이다.
<이정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