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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대 장영실연구소 개소

인문학과 기초과학의 학문교류, 인간중심의 과학연구

등록일 2010년11월09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장영실 영정
선문대학교(총장 김봉태)는 지난 4일 오후 3시 선문대 본관 122호 대강당에서 장영실연구소(소장 임승휘) 개소식을 가졌다.

선문대 장영실 연구소는 국가의 과학경쟁력이 국력인 시대에 기초과학과 공학연구 육성을 도모하고 과학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문화적 기반을 조성하려는 목표로 설립됐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연구소는 인문학과 기초과학의 학문간 교류를 추구하면서, 장영실이라는 역사의 대표적인 과학자를 학술적으로 재조명하고 과학사를 재정립한다는 것이다. 또 장영실을 비롯한 우수한 문화적, 정신적 자산을 계승 발전시키고 이를 과학문화에 대한 연구와 교육, 문화사업과 연계해 과학 문화 창조의 디딤돌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공계 교육과 연구에 대한 관심은 날로 저하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첨단 기술의 선도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수학과 공학 교육을 장려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부의 지원과 투자가 절실하다.

역사적 자산이며 조선시대의 과학발전을 상징하는 장영실은 이제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다시 태어나, 과학 교육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매김 시킨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장영실연구소 임승휘 소장은 “장영실 연구소를 기반으로 2011년 선문대에서 열릴 충남 과학축전의 성공적인 개최와 운영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 지역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대학의 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며 “선문대학교 장영실 연구소는 단순한 대학 내 연구소가 아닌 아산을 대표하면서 전국적인 위상을 지닌 연구소로 거듭나고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선문대학교는 지난 4일 오후3시 선문대 본관 122호 대강당에서 장영실연구소 개소식을 가졌다.

아산을 빛낸 과학자 장영실
 

장영실 동상
본관이 아산인 장영실(蔣英實)의 묘소는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있다.

1421년(세종 3년) 명에 유학해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고, 이후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은 그를 천인의 신분에서 해방해 중용하려 했지만,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1432년 장영실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기기 제작을 감독했다. 이듬해에는 천체관측기구인 혼천의를 완성했다. 1434년 그는 문헌에 전하는 송나라 과학자 소송의 물시계와 이슬람인들이 쇠로 만든 공이 굴러 떨어지면서 종과 북을 쳐서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물시계를 비교해 자동시보장치가 된 물시계 자격루를 만들었다. 또 금속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갑인자 제작을 감독했다. 1437년 천체관측용 기구 대·소간의, 공중시계 앙부일구,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 태양시와 항성시를 측정해 주야 겸용 시계로 쓴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등을 완성했다. 1438년에는 자격루의 일종인 옥루를 제작하고, 경상도 채방별감이 되어 동과 철의 채광 및 제련을 지휘·감독했다. 1441년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와 하천 수위 측정기인 수표를 제작해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각종 과학기구 제작에 성공한 장영실은 세종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대호군까지 올랐지만, 1442년 임금이 타는 가마인 안여가 부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사헌부는 이 일을 구실삼아 장영실을 불경죄로 탄핵했다.

신분제 사회이며 사농공상의 직업적 차별이 분명하게 존재하던 조선시대에 관노 출신 기술자가 종3품 벼슬까지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가 석연치 않은 일로 물러나면서 더 많은 업적을 역사에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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