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교 시절, 같이 일하는 조교들끼리 두 달에 한 번씩 모여 술을 마셨다. 그때 한 조교가 놀라운 얘기를 했다.
학생 때 보던 것과는 달리 자기를 지도하는 교수가 그리 훌륭한 분이 아니라는 거였다. 연구비를 착복하는 건 기본이고, 제약회사가 학회에 기탁한 공금까지 횡령했단다. “근데 왜 아직 교수에서 안 잘렸어?” 당시만 해도 세상의 순수성을 믿었던 내 질문에 친구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안 그런 교수가 어디 있냐? 우리 교수가 좀 심하긴 하지만 말야.”
항상 인자한 미소를 짓던 그 교수에게 인사를 하면서 속이 거북했다. 그 후에도 친구는 그 교수의 비리들을 수시로 이야기해줬다.
“그 아래 교수가 연구비를 삥땅쳐서 어렵게 천만 원을 만들어 드렸더니 석달만에 다 썼다더라. 손도 크시지.”
“대학원생을 받으면 실험비 명목으로 일인당 천만원을 받거든? 근데 실험은 연구비를 따서 한단 말이야. 그 천만원은 누가 챙기겠니?”
그래도 논문은 많이 쓰지 않느냐는 누군가의 말에 친구는 다시금 피식 웃었다. 그 교수가 논문이 많은 건 밑에 있는 교수 셋이서 논문을 쓸 때마다 이름을 넣어 준 결과일 뿐, 실제로 그 교수가 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그러니 자기 이름으로 나간 논문이지만 내용은 커녕 제목도 제대로 잘 모른다는 거였다.
“교수님이 그러더라고. 외국 나갔는데 외국인 한 명이 무슨 논문에 대해 물어보더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네가 쓴 거잖냐?’고 하더란다. 이거 국제적 망신 아냐?”
교수의 본업은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것, 돈은 애들 키우는 데 썼다 치자. 연구를 하나도 안했다면 그 교수는 길고 긴 30년을 과연 뭘 하고 보냈을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조교를 마친 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그 교수가 퇴임할 때 훈장을 탔다는 얘기를 전해줬다.
“미친 거 아냐? 왜 그 사람한테 훈장을 줘?”
늘 그렇듯이 친구는 피식 웃었다.
“넌 훈장에 대해 아주 성스럽게 생각하고 있구나? 훈장이란 절대 그런 게 아냐. 그냥 국립대에 오래 있으면 누구나 받는 거야. 교수로서의 본분을 다 했건 못 했건 간에.”
갑자기 그 친구가 생각난 이유는 북한에서 망명했던 황장엽 씨가 죽고 난 뒤 훈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친구의 지도교수가 받았던 동백장이 아닌, 1등급에 해당하는 무궁화장을 받은데다 시신도 현충원에 안장한단다.
훈장이란 게 아무리 아무한테나 수여하는 것이라 해도, 이건 좀 과한 게 아닌가 싶다. 그가 망명한 이유도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인데다 그가 남한사회로 넘어온 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도대체 어떤 기여를 했는지 생각나는 바가 전혀 없다.
1997년 4월 서울에 온 황장엽은 “평화통일에 한 몸을 바치겠다”는 도착성명과 달리 북한이 곧 전쟁을 일으킬 것임을 여러 차례 경고하며 긴장조성에 한몫을 했는데, 당시가 대선이 열리는 해였고, 한보 사태와 경제위기로 인해 정권의 인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출현은 보수세력에겐 구세주 그 자체였다.
심지어 황씨는 서울에 오기 전 “강력한 여당건설” “군대와 안기부 강화”를 주문했고, 보수언론에선 우리나라에 있는 친북세력의 명단을 그가 확인해 줄 거라는,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니까 그는 철저히 대선용으로 이용당했으며, 외환위기라는 악재 속에서도 여당 후보가 30만표 차이로 선전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내가 아는 황장엽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황장엽같은 인물이 활약할 무대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1997년 당시의 집권층을 계승한 한나라당이 그에게 훈장을 주는 건, 결과는 나빴을지라도 그때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아름다운 동기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렇게 해줘야 2012년에 누군가가 또 내려와 분위기를 잡아줄 테니 말이다.
위에서 보듯 국가의 녹을 먹으면서 30년을 놀아도 훈장, 대선 때 망명해 정부여당을 도와도 훈장을 받는다. 그러니 훈장을 받았다고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니며, 훈장을 못받았다고 서러워할 필요도 없다.
“황장엽이 왜 훈장이냐고 화내시는 분들, 흥분 가라앉히세요. 훈장은 원래 그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