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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역사적 실체가 벗겨지는 그날까지

백승명(직산위례문화연구소장, 해동금석문역사지리연구원장)/ 목천 세성산 동학농민운동 115주년 위령제 행사에 다녀와서

등록일 2009년12월15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115년 전 충청도 목천 세성산에는 당시 침탈야욕을 부리던 외세와 이 땅의 탐관오리 등의 부패한 세력에 맞서서 당당히 일어선 우리의 선현(先賢)이 계셨다.

당시의 ‘동학농민군(東學農民群)’은 위정자 등의 부정부패와 탐획을 일삼던 관료 등에 대하여 시정과 개혁을 요구하고 일본과 외세의 침탈행위 등에 대하여서는 배척할 것 등을 요구하며 이른바 동학농민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때 가장 큰 위협을 느낀 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이 탐관오리와 일본 및 그들의 추종세력들이다.

당시의 부패한 위정자들과 일본 및 그들을 추종한 부패세력들은 급기야 동학농민군(群)의 백성들을 소위‘반란군(叛亂軍)’으로 몰아 대대적인 살육만행을 강행하기에 이른다.

이때 우리의 동학농민군의 선현들은 동학농민군(群)에서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으로 무장해 그들의 살육만행과 불의에 맞서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동학농민군은 신무기로 중무장한 일본군과 야합한 관군 등의 대대적인 공격과 병력의 열세 및 그들의 무차별 살육만행에 수많은 백성과 동지와 터전을 잃고 퇴각과 해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성산은 그 당시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은 훗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당시의 신군부에 의해 재현되었던 점을 살펴볼 수가 있다.

1980년 당시 신군부세력은 광주민주화 운동을 ‘반란(叛亂)’이라 명명하고 소위 ‘시민군(市民群)’을 ‘반란군(叛亂軍)’으로, 지도자를 ‘수괴(首魁)’라 하는 등의 과거 1894년 갑오년 당시의 역사적 전철을 그대로 밟았었음을 국민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역사속의 광주는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명명돼 전 세계 민주화운동의 본보기 속에 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전 세계의 인류는 주목하고 있다.

목천땅 세성산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잘못된 평가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면서 시작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조직한 소위 ‘이왕직편찬실(李王職編纂室)’과 ‘조선역사편수국(朝鮮歷史編修局)’에서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더불어 <고종실록>과 <동학난사(東學亂史)> 등을 편찬하면서 기용한 친일세력 등의 역사편수관 등을 동원하여 우리민족의 위대한 동학농민운동(군)을 ‘반란군’, ‘비도(匪徒)’, ‘폭거’, 지도자는 ‘괴수’, ‘수괴’, ‘거두’ 등의 온갖 악랄하고도 교묘한 용어들로 매도하고 역사의 실체를 왜곡하여 왔던 것이다.

우선 동학농민군의 활동사항 어디에서도 당시 조선이라는 봉건주의 전제왕권에 대하여 이를 전복시키려 했다거나 왕을 갈아치우려 한 사실 등이 전혀 없으므로, 일본과 야합한 친일계 정파, 학파 류의 주장처럼 ‘반란군’이라는 기록과 주장은 당시의 사료(史料)와 정황, 그 설득력과 객관적인 증거 부족의 괴변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군이 반란군이 아닌 이상 ‘비도(匪徒)’니, 그 지도자를 ‘괴수’, ‘수괴’, ‘거두’라고 하는 용어 또한 어불성설이다.

끝으로 ‘폭거’의 문제는 일본군과 야합한 친일계와 관군 등의 무차별 살육, 방화 등의 만행에 수많은 백성과 동지, 터전 등을 잃은 것에 대하여 무장을 하고 대항한 것이지 동학농민군이 처음부터 ‘폭거’ 등을 하지 않았음을 올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왜곡은 친일계의 정계와 일부 그 후손과 속칭 ‘친일파’의 학맥을 이어받은 일부의 강단과 재야의 일부 친일성향의 학자 등에 의하여 왜곡되어 왔다. 여기에 일부 지역향토사가 등에 의하여 세성산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실체는 철저하고도 교묘하게 그 실체를 왜곡되어 왔다.

그 실례로 지난 1997년에 간행된「天安市誌(천안시지)」와 2000년에 간행됐다가 수거돼 폐간조치된 「천안백년변천사」와 같은 인쇄물에 세성산 동학농민운동사는 철저히 왜곡시켜 기술돼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란의 형세에서 구하고자 혼연히 일어섰던 115년 전의 동학농민군처럼 이제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수십 년 전부터 학계와 재야를 비롯한 수많은 곳에서 동학운동에 대한 올바른 역사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비록 만시지탄이나마 십여 년 전부터 동학농민군의 위대한 사상과 이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세성산 위령제를 지내는 등의 수고를 하고 있는 천안농민회의 결행은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되고 옳게 기록되어져야 할 것이다.

천안시와 충남도는 통한의 역사 속에 묻혀있는 목천 세성산 동학농민군의 영령을 위로하고 위대한 업적을 살리고 계승하며 올바른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의 진실과 그 실체를 이어주기 위해서이며 아울러 목천 세성산에 대한 역사적 진실과 실체를 밝히는데 적극적인 지원과 성원을 아끼지 말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목천 세성산 동학농민군의 영령선현님들, 역사의 실체가 밝혀지고 새롭게 조명되는 그날까지 부디 편히 영면하소서.”


단기 4342년(서기 2009년) 음력 10월20일 세성산 위령제가 거행된 역사의 현장에서….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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