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은 현존하는《삼국유사》와《세종실록지리지》,《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직산현지(稷山縣誌: 옛 직산지방의 읍지)》,《대록지(大麓誌: 옛 목천지방의 읍지)》,《영성지(寧城誌: 옛 천안지방의 읍지)》등등의 역사적 사료(史料) 등에 의하면 예로부터 교통과 역사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던 고장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앞에서 제시한 사료(史料) 등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백제의 건국지였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 옛 직산현(稷山縣) 지방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고려의 태조 왕건이 그 지리적 위치의 중요함에 일찍이 지금의 천안지역 일원과 그 주변을 아울러서 ‘천안도독부(天安都督府)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최근의 ‘천안위례산성 발굴조사보고서(天安慰禮山城 發掘調査 報告書)’와 천안시 성남면 ‘용원리 유적조사보고서(龍院里 遺蹟調査 報告書)’를 비롯한 각종 발굴(發掘) 및 시굴(試掘)과 지표조사(地表調査) 등의 보고서류와 관련 학자의 논문과 저술 등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실례로 실체(實體)의 위례(산)성〘慰禮(山)城〙이 지금의 천안지역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 제280호인 ‘성거산 천흥사동종(聖居山天興寺銅鐘)과’ 국보 제209호인 ‘보협인석탑(寶篋印石塔)’ 및 국보 제7호인 ‘봉선홍경사사적갈비(奉先弘慶寺事蹟碣碑)’와 고려태조 왕건과 관련되는 왕자산(王字山)의 내용과 유적 등등이 현전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뒷받침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써 불교문화유산으로 ‘천흥사지(天興寺址)’와 ‘개천사지(開天寺址)’ 및 ‘봉선홍경사지(奉先弘慶寺址)’를 비롯한 근 100곳의 폐사지(廢寺址)와 현존하는 광덕사, 성불사, 만일사 등을 비롯한 수많은 사암(寺菴: 절과 암자)은 이러한 불교문화유산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한편, 유교문화유산으로서도 ‘직산향교(稷山鄕校)’와 ‘목천향교(木川鄕校)’ 및 ‘천안향교(天安鄕校)’ 등을 비롯하여 각 문중의 제실(祭室)과 사당(祠堂) 및 정려각(旌閭閣) 등의 유교문화유산은 천안지역이 전통적인 충효(忠孝)의 고장이었음을 입증하여 주는 사례들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앞의 이러한 실례와 일례 등을 제쳐두고도 천안지역에는 위례(산)성과 성거산성 및 흑성산성과 세성산성 등을 비롯한 50여 곳이 넘는 관방유적(關防遺蹟) 등이 있어서 군사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던 곳임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우연치고는 이상하리만큼 이러한 역사와 문화를 보전하고자 노력하는 전국의 지역문화원 중에 천안만이 전국에서 유일무이하게 3개소의 문화원(천안, 성환, 아우내문화원)이 존치하여 오고 있음도 앞의 유구한 역사적 사실 등에 비추어 보면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
각 문화원별로 활동해온 내용을 통합하여 그 핵심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고유한 우리문화 및 향토문화의 발굴과 전달 그리고 교육과 홍보 등등의 문화원 고유의 업무를 수행하여 오면서 일부분은 나름대로 천안지역의 정체성확립과 천안지역 문화의 홍보를 충실히 수행을 하여왔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언론을 통하여 보도되었던 천안지역의 모 00문화원은 천안지역의 역사적 사실과 반하는 일부의 사업 등과 내부의 부조리와 비리 등으로 얼룩져서 타지역의 문화원과 타인들로부터 ‘비리의 온상’, ‘비리문화원’ 등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항간에 회자(膾炙)될 정도로 그 문화적 신뢰를 실추했다.
아무튼 해당의 00문화원은 ‘천안시지(天安市誌:1997년 판)’를 비롯하여 ‘천안향토사(天安鄕土史)’, ‘천안문화재도록(天安文化財圖錄)’, ‘천안인물사’ 등의 인쇄물 등을 간행한 사실이 있다. 일부에서 나름대로 ‘자료의 정리’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 인쇄물 등은 그 핵심적인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과 오류’ 및 와전(訛傳)과 난맥(亂脈)으로 얼룩진 내용과 소위 ‘재탕’이라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인쇄물의 발행이라는 결코 좋지 않은 큰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었고 그렇게 항간에 회자되어 왔음을 그간에 보도된 언론 등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후에 해당 00문화원이 주축이 되어 ‘천안지역의 근현대사를 조명한다’고 떠들어 대며 만들었던 ‘천안백년변천사’는 발간 전후의 언론보도 등을 살펴보니 핵심내용에 친일파 및 일제의 침략행위 등등에 관한 미화(美化)와 다수의 왜곡과 오류로 얼룩진 책자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에는 천안농민회 등의 ‘시민단체의 저항’ 과 공청회 등을 통하여 그 잘못을 인정하고 수거 후 폐간조치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이외에도 해당 00문화원 발행의 00인쇄물 따위의 많은 인쇄물과 그 내용들은 많은 부분이 소위 표절과 타인의 글을 무단전재(無斷轉載)하여 발췌하고 여기에 초설【剿說; 기존에 이미 발표된 남의 학설(學說)을 훔쳐 마치 자기가 찾고 연구한 양 발표하여 제 것처럼 행하는 반도덕적 반학문적 행위를 말함】을 가미하여 소위 ‘엉터리’로 짜깁기한 내용에 각종의 내용을 뒤죽박죽으로 재 짜깁기 및 편집하는 과정에서 잘못 파생된 내용 등으로 인하여 오류와 역사의 왜곡을 가중시켜 왔다.
이러한 내용 등은 소위 이와전와【以訛轉訛: 거짓말에 또 거짓말을 보태어 다시 거짓으로 전달하는 거짓말을 말함】를 가중시켰고 그에 대한 수정과 보완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심한 경우에는 일부의 사업에 소위 ‘책 겉표지 바꿔치고 거의 재탕한 엉터리 인쇄물’을 발간 배포하는 방식으로 사업성과 부풀리기 방식 등의 옳지 않은 방법으로 사업을 실시해 왔음이 그간에 보도된 일부언론의 내용과 필자가 행정절차에 의한 회계서류 등을 검토한 결과에서도 확인한 바 있다.
앞의 이러한 내용 등에 대하여 언론을 비롯한 시민단체나 관련학자 등이 여러 방면에서 그 내용 등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비판적(批判的) 지적을 하자 그 반론(反論)이 학술적이거나 학문적으로 또는 지면토론이나 소위 일종의 공청회 등의 자리에서 말하거나 글로써 대하는 소위 학문적으로 대하지 않고 어떤 해당자들은 후면(後面)에서 법적대항 운운하며 적반하장(賊反荷杖)에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방법 등으로 우기며 대하고 나왔다가 결국에는 그 행로(行路)에 종지부(終止符)를 찍고 말았던 사례 등도 있음을 볼 때 지금 천안 향토문화의 현주소가 어떠한 지를 과히 대략적으로 파악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일찍이 타 시군 구의 지자체나 문화원 및 문화단체나 기관 등에 자문 및 감수위원과 강사 등으로 활동해오면서 늘 느껴왔던 점은 ‘개방(開放)과 투명(透明)’이었다.
이러한 좋지 않은 과정과 결과는 끝내 ‘00문화원 사태’라는 일부 사단의 종지부를 찍어 지역적 망신을 당하고 충실하게 운영하지 못한 체 결국에는 좌초될 수밖에 없었고 그 문화원은 구원의 손길 또한 아주 요원하여 심해 구렁의 골짜기로 침몰하고 있으며 종국에는 “천안지역 향토문화의 신뢰를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을 시켰다”라고 항간에 회자되고 있어도 역시 과언이 아닐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커다란 일부의 잘못된 운영은 천안지역 역사의 오류와 왜곡에 와전과 이와전와를 가중시켰다.
천안지역의 역사왜곡과 표절 및 초설과 와전에 이와전와를 가중시킨 내용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고 그 내용들이 왜 커다란 문제인지에 대하여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진리의 탐구라는 학문 본연의 취지에 더 이상 좌시할 수만은 없었고 또 일반인과 내외국인 및 후손에게 천안지역의 향토문화(사)에 대하여 거짓과 왜곡된 역사를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과 국민의 올바른 알권리 차원에 천안지역의 올바른 향토문화(사)를 대중에게 다시 전달하고 그에 대해 정립하고자 필자는 충남시사에 그 내용 등에 대하여 연재를 시작 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와 성원 및 고평의 토론을 기대하며 천안향토문화를 조정(措定)하고 재정립(定立)을 한 후에 다시 정립(正立)하고자 한다.
※필자가 연재하는 기고내용의 무단전재(無斷轉載)나 전체의 내용에 대한 무단전재(無斷轉載)는 필자의 지면승낙 없이는 사용할 수 없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