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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5일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농민대회 출발을 앞두고 아산시청에서 만난 장석현 회장. |
“땅의 정직함만을 믿고 그동안 묵묵하게 농업에 종사하며, 먹거리를 지켜온 농민들은 요즘 참담한 심정이다. 농업사상 유례없는 대풍년이 들어도 수확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가격폭락을 먼저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그저 한탄스러울 뿐이다.”
11월25일(화) 서울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 참가준비에 분주한 장석현(51) 전국농민회총연맹 아산농민회 회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아산농민회는 ‘농민의 날’인 11월11일 아산시청 앞 광장에 볏 가마와 출하를 포기한 김장배추를 쌓고 무기한 천막농성에 들어가 이날 보름째를 맞고 있었다.
장 회장은 “농업문제는 결코 가벼운 경제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복잡하고 다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정부의 한없이 근시안적인 농업정책은 할 말을 잃게 한다. 아니 제대로 계산된 중장기 경제적 논리라면 농업은 가장 최우선적으로 보호돼야 할 산업이다”라는 말과 함께 입을 열었다.
장 회장은 1980년대 농민의 기초생존권을 확보하고 민족의 생명산업인 농업을 지켜내기 위한 의지로 지역 농민들과 함께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농업은 구조적 한계 속에서 붕괴되고 있는데 종합적인 진단도 없이 그때그때 생색내기 땜질식 처방만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식량주권과 농민의 기초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요구를 집단이기주의로 몰고 가는 세력까지 있었다. 그 결과 농업은 현재 만신창이가 돼 있고, 고령화되는 농촌을 뒷받침해 줄 젊은 농업인이 없어 대마저 끊기게 생겼다.”
실제 농민들의 요구는 누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한 내용이다. 일한만큼 정당한 대가가 돌아오게 해 달라는 것이다.
“현재 국내 농업현실은 농사를 지어도 농촌에서 일한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구조다. 모든 물가가 올라도 농산물 값은 오르지 않는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우리나라 농산물 값의 반에 반도 안되는 농산물들이 얼마든지 많기 때문이다. 어쩌다 생산량이 조금 많다 싶으면 여지없이 농산물 값은 출하를 포기해야 할 정도로 폭락해 버린다. 정부는 이러한 우리나라 농업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보다는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농업을 포기하려는 노골적인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
장 회장은 국민적 공감대 형성도 없는 상황에서 경제적 실익조차 검증되지 않은 한·미 FTA(자유무역협상)의 타결에만 집착하는 정치권의 비민주적이며 안이한 태도에 실망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농민에게 돌아가야 할 직불금마저 착복하는 부도덕한 정부관료와 정치권에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냐고 덧붙였다.
또 농업의 극한상황에서 농민조합원의 권익수호에 앞장서야 할 농협은 농민의 위기상황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고. 특히 아산지역의 우량농지들이 각종 개발로 파헤쳐지는 것도 우려할 수준이라고 말했다.
장 회장은 농촌과 고향을 지키며 국민의 생명산업인 안전한 먹거리를 지키는 농민들을 세계화의 흐름에 역행하는 이단아 취급을 하고 있는 정치권, 왜곡된 여론을 조장하는 일부 언론의 보도 행태도 함께 꼬집었다.
장 회장은 농촌붕괴의 위기는 도시민도 함께 고민할 문제라고 설명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생명산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소비자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유전자 변형 농산물에서부터 광우병 소고기와 방부제 등 각종 유해환경에 노출된 수입농산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응해 이 땅에서 생산한 우리의 안전한 먹거리에 확신을 심어 준다면 우리 농민에게도 승산이 있지 않겠냐”며 마지막 희망은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산시 음봉면 백석포리는 장석현 회장이 나서 자라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터전이다. 장 회장은 자연스럽게 농업을 천직으로 삼고, 농업의 현대화에 앞장서 왔다. 지역에서 선도적으로 기계화 영농을 시작한 장 회장은 생산효율 극대화에 성공한데 이어 고부가가치 농산물 생산을 위해 다양한 실험적인 영농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지역 농민운동을 선도해온 그는 생명산업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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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5일, 아산시청앞 광장에 벼 가마을 야적하고 보름째 천막농성을 벌이던 아산농민회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에서 열리는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해 생존권보장을 요구했다. |
<이정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