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는 홍수와 태풍피해가 없어 그 어느 해보다 배농사가 잘됐다. 맛 좋고, 빛깔 좋고, 무엇하나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한 풍년농사였다. 그런데 하나하나 정성껏 수확한 농작물을 다시 파묻어야 하는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아산시에서 처음으로 배 산지폐기를 실시한 이근영씨(66·아산시 방축동)의 말이다. 아산시는 현재 이씨의 농장을 시작으로 둔포, 음봉, 아산원예농협 등 배 주산단지에서 대대적인 배 매립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조경수 묘목을 기르던 이근영씨가 배농사에 뛰어든 것은 1990년부터다. 올해로 18년 된 배 나무는 왕성한 생명력을 보이며, 생산량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 이씨에 따르면 당시 비슷한 시기에 배농사를 시작한 농가가 매우 많다고 한다.
올해 이씨에게 가을은 더 이상 풍요롭고 넉넉한 계절이 아니었다. 이씨는 자신의 과수원에 힘겹게 수확한 배를 다시 묻어야 했다. 올해 이씨는 유난히 모든 일이 힘에 부쳤다고 한다. 그러더니 결국 지난 한해 과수원에서 흘린 땀은 넉넉한 수입이 아닌 무거운 부채로 돌아왔다.
“올해 초부터 비료를 비롯한 각종 영농자재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관리기와 트렉터 등 각종 농기계와 운반수단인 트럭을 움직일 때도 기름 값 폭등으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봄에는 예년보다 개화기가 일찍 찾아와 인공수분 시점을 맞추기 위해 온 가족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과수원에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용역시장에서 인력을 조달해 썼다.
과일이 탐스럽게 익어갈 무렵부터는 온갖 유해조수들과 싸우며 사투를 벌였다. 그렇게 수확한 농작물 3톤 남짓한 분량을 시장에 나가기도 전에 자신의 손으로 땅 속에 묻어야 했다.
1년 수확의 30% 이상 소비되던 추석명절이 예년보다 10일 가까이 빨라 출하도 제대로 못했다. 결국 소비처를 잃은 배가 창고에 가득 쌓여 이씨는 산지폐기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린 것이다.
“가을에 제값 받고 넘겨 생산원가 제외하고, 생활비도 마련하고, 대출금도 갚으려 했건만…”
<이정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