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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전시의에서 말을 달리며 창술 시범을 보이고 있는 장면.(이번 축제에 총 6회 시범공연을 보인 무과전시의는 관람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16년 전인 1576년(선조9년) 2월 식년무과에 급제했다.
이순신 장군의 무과급제 교지는 그가 무과시험에 합격했음을 증명하는 공식 문서다. 일종의 합격증이었던 이 교지는 현재 아산 현충사에 소장돼 있다.
식년무과는 3년에 한 번 실시되는 정식무과시험으로 합격 자체가 어려운 시험이었다. 무관 집안 출신이 아닌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합격하기까지 활솜씨로 유명했던 장인 방진의 영향과 도움이 컸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추정이다.
1576년 실시된 식년무과의 합격자 명단인 병자무과방목을 보면 단시 합격자 중 최고령은 45세이고 평균 합격연령이 34세였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32세에 합격한 이순신은 오히려 젊은 편에 속했다.
특히 당시 이순신 장군의 성적은 눈길을 끈다. 장군의 성적은 '병과4등'으로 전체 합격자 29명 중 12등에 해당했다. 이순신 장군의 성적이 좋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당시 무과시험은 초시, 복시, 전시 등 3단계로 치러졌는데 최종 합격서열을 정하는 전시시험은 일종의 스포츠 경기인 격구 만으로 치러졌다.
다시말해 이순신 장군의 격구 실력은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병법 지식을 평가하는 강서와 활쏘기에 능했지만 이들은 전시 시험종목이 아니었으므로 최종 성적이 좋을 수가 없었던 것.
특히 격구 중 말을 타는 기격구에서 이순신 장군이 더욱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무과합격자 29명 중 25명이 내금위, 갑사 등 현직 하급군인이었다. 민간인 신분이던 이순신 장군이 체계적으로 승마기술을 배운 현직 군인들을 기격구에서 능가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무과시험은 1등인 갑과 수석은 초임 품계가 종6품, 갑과 나머지 2명은 정7품, 을과 합격자 5~7명은 정8품, 이순신 장군과 같은 병과 합격자는 9품이 수여됐다. 이순신 장군이 9품 보직인 권관으로 군생활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제47회 아산성웅이순신축제 교육자료 인용)
이순신축제기간 총 6차례 선보인 무과전시의(24반무예)는 조선시대 무과와 당시 병장기 사용방법 등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줬다. 특히 무예 전수자들이 실전용 무기로 말을 달리며 보여준 시범에 많은 관람객들이 호응을 보였다.
<이정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