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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정씨 아내가 인터뷰도중 심한 기침으로 생긴 남편의 가래와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
최봉정·38·아산시 용화동
“코피를 한 번 쏟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왈칵왈칵 흘러 내렸습니다. 휴지를 한 움큼 손에 쥐고 틀어막아도 쉽게 멈추지 않아 눕지도 못한 채 제발 피가 멈춰주기만을 기다리며 고통의 밤을 지새야 했습니다. 뜨끈하고 비릿한 그 냄새, 역하게 끈적이는 그 검붉은 액체를 걷어내고 나면 이내 찾아오는 현기증. 수없이 찾아오는 절망감과 죽음의 공포…. 이제 더 이상 시달리지 않고 맞서 싸우렵니다.”
평범한 가장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를 둔 최봉정(38·아산시 용화동)씨. 최씨에게 찾아온 첫 시련은 지난 2001년 가슴이 답답해서 찾은 천안의 한 병원에서였다. 당시 병원에서는 폐기능 검사와 조직검사를 통해 폐결핵으로 진단했다.
폐결핵 진단을 받은 최씨가 6개월간 약물치료를 받자 병원에서는 완치판정을 내렸다. 최씨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이후 작은 충격에도 몸에 멍이 들고 한 번 생긴 멍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혈액검사와 골수검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서울 S병원을 권유했다.
2002년 2월17일, 혈소판감소증이라는 진단명을 받았고 같은 해 3월5일 재검사를 통해 이름조차 생소한 희귀난치병질환인 골수이형성증후군(MDS)으로 최종 진단을 받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5년 여의 긴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그동안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 약물치료를 비롯한 갖가지 방법을 써 봤다. 그러나 좋아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고 일반인들에게는 12만개인 혈소판 수치가 2만을 넘지 못했다.
결국 골수이식을 결정하고 기증자를 찾아 나섰다. 4남1녀의 막내인 최씨는 형제들을 대상으로 검사를 했지만 모두 조직이 맞지 않았다. 그러다 다행히 일본의 한 기증자와 조직이 일치해 새로운 삶의 희망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동안 최씨는 자신의 몸에서 이상이 발생될 수 있는 모든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축농증수술, 사랑니와 어금니 제거 등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지혈이 안 돼 수차례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다.
지난 2006년 10월25일 드디어 최씨는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일본의 한 기증자로부터 골수기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어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로 38년간 사용한 이름을 최종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병마와 싸우는 동안 늘어난 빚더미 막막
이식수술을 마쳤으나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후유증에 서울로 이송해야 했고, 언제까지 그 생활이 지속될 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최씨가 병마와 싸우는 동안 집안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식당 등을 다니며 허드렛일로 집안을 돌보던 아내 김영미(34)씨도 최씨를 간호하느라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고, 치료받는 동안 초등학교 재학 중인 세 자녀는 친척집에 맡겨져야 했다. 노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까지 도움을 받아 왔지만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고, (그들에게) 여력도 없어 보인다.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처분되고, 카드돌려막기도 한계에 부딪혀 어느새 신용불량자가 돼 있었다.
최저생계비만으로 각종 공과금과 약국에서 거즈 한 장 사기도 버겁다. 앞으로 건강만 회복된다면 평생 빚을 갚으며 살아가려 마음먹지만 당장 하루하루 생활조차 막막하기만 하다.
“제2의 삶을 위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오늘도 병마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꿋꿋하게 이겨낼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를 위해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살겠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최씨는 휴지로 입을 가리고 힘없는 기침을 해댔고 그의 아내가 가래를 받아내고 있었다. 앙상한 손가락과 각종 후유증에 얼룩져 새까맣게 변한피부, 부르튼 입술, 하루하루가 고단해 보이지만 그의 삶에 대한 애착만큼은 꺼지지 않고 있다.